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오늘은 두 구절의 말씀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萬古無心만고무심, 白雲靑峰백운청봉.”이란 법문입니다. 萬古無心만고무심이란, 만세토록 변하지 않는 진리의 마음은 본래 텅 비어있고 집착이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며 수많은 일을 겪습니다. 기쁨과 슬픔, 성공과 실패, 사랑과 미움이 끊임없이 우리를 흔듭니다.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은 말합니다. 본래의 마음은 일체의 번뇌에 물들지 않고, 늘 고요하며 맑다는 것입니다. 번뇌가 마음을 덮을 수는 있어도, 본래의 성품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마치 하늘 위로 구름이 스쳐가도, 하늘은 언제나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만고무심”의 가르침입니다. 白雲靑峰백운청봉이란, 푸른 봉우리에 흰 구름이 유유히 흐른다는 뜻입니다. 푸른 산은 자리를 옮기지 않고 굳건히 서 있고, 구름은 때로는 모였다 흩어지며 자유롭게 흘러갑니다. 우리 삶도 이와 같습니다. 세상일은 구름처럼 생겼다 사라지지만, 도량과 진리는 봉우리처럼 굳건히 자리를 지킵니다. 우리가 불법에 귀의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구름처럼 변하는 인연 속에서, 산처럼 변치 않는 진리를 배우기 위함입니다. 사랑하는 불자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마음이 곧 부처라 하였습니다. 진리를 멀리서 찾을 필요 없습니다. 오늘 하루, 우리가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에 깊은 의미를 담고, 우리가 내쉬는 한숨 한숨마다 자비의 향기를 머금는다면, 그 자리가 곧 도량道場이요, 그 삶이 곧 수행修行이 됩니다. 사람은 본래 청정한 존재입니다. 번뇌도, 탐욕도, 미움도 덮여진 것이지, 태어난 마음은 맑고 고요합니다. 그러니 다른 데서 길을 찾지 마십시오. 당신의 마음 안에 이미 그 길이 있습니다. 오늘 하루도 자비로움으로 말하고, 지혜로 듣고, 감사함으로 걸으십시오. 그리하면 당신의 삶은 그 자체로 부처님의 법문이 됩니다.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법성본무생法性本無生이란, 법의 본성은 애초에 생겨남도, 사라짐도 없는 자리입니다. 태어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참된 자성自性입니다. 그러나 중생의 눈에는 세상 모든 것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변화로 보이기에, 거기에서 온갖 집착과 번뇌가 일어납니다. 시현이유생示現而有生이란, 부처님은 이러한 중생의 눈높이에 맞추어, 생겨남이 있는 듯 시현해 보이십니다. 진리는 말 없이도 머무나, 중생의 깨달음을 돕기 위해 부처는 모습과 소리를 빌려 진리를 설하시고, 그 진리를 일깨우기 위해 육신을 드러내십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방편方便'입니다. 시중무능현 역무소현물 是中無能現 亦無所現物이라, 그렇다면 이 모든 시현 속에는 '나타내는 자'도, '나타나는 대상'도 없습니다. 이는 곧 ‘주체와 객체’, ‘너와 나’라는 이분법적 분별이 진실이 아님을 뜻합니다. 보는 이도 없고, 보이는 것도 없는 경계, 그것이 바로 무생법인無生法忍의 세계입니다. 세간의 눈에는 분명히 '있다'고 보이지만, 진리의 눈으로 보면 거기엔 실체가 없습니다. 불생불멸, 무소무위한 그 자리를 본다는 것, 그것이 바로 법성法性을 보는 눈, 지혜의 눈입니다. 오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옛날 어느 마을에, 한 사람은 재산이 많은 늙은 부자였고, 다른 한 사람은 가난한 홀아비였다. 이 홀아비에게는 총명하고 예쁜 딸이 하나 있었지만, 살림이 몹시 궁핍했다. 그래서 그는 자주 이웃의 부자 노인에게 돈을 꾸어 생활을 이어갔다. 처음엔 적은 돈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빚이 커져 갚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때 부자 노인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이젠 이 홀아비가 내 돈을 갚지 못할 테니, 그 딸을 대신 받는 게 좋겠군.” 는 입가에 음흉한 미소를 띠며, 바로 그 집으로 찾아갔다. 그날도 딸과 함께 앉아 근심에 잠겨 있던 홀아비는 노인의 방문을 받고 섬뜩한 예감을 느꼈다. ‘이 영감이 이제 와서 빚 독촉을 하려는구나…’ 그러나 손님을 차갑게 대할 수 없어, 겉으로는 반갑게 맞아들였다. 노인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점잔을 떨다가 슬쩍 말을 꺼냈다. 요즘 살림살이는 어떤가?” “어렵게 지내고 있습니다.” “그럼, 끼니라도 잇도록 내가 돈을 좀 더 빌려주지…” 뜻밖에도 돈을 먼저 꺼내려는 태도에 아버지는 더욱 불안해졌다. 그러자 노인은 본심을 드러냈다. “이 나이에 혼자 살기가 외롭소. 그러니 그대 딸을 내 곁에 두고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지옥이 텅 빌 때까지 나는 열반에 들지 않겠다.” 이 한마디 서원 앞에 우리는 고개를 숙이게 됩니다. 이 세상에는 먼저 오르고자 하는 이가 많고, 먼저 구원받고자 하는 이가 많습니다. 그러나 지장보살은 가장 늦게 성불하겠다고, 가장 아픈 이들을 끝까지 놓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분은 중생이 모두 구제되기 전에는 혼자 편안해지지 않겠다는 대원大願을 세우신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지장대원본존地藏大願本尊이라 부릅니다. "대원"이란 무엇인가? 대원大願이란 큰 기도이며, 큰 책임이며, 큰 자비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무엇을 이루고 싶다’는 소원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을 내 고통처럼 여기는 마음에서 비롯된 맹세입니다. 지장보살의 대원은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가 가장 외로운 이, 가장 죄 많은 이, 가장 미움받는 이 곁에 머무는 실천입니다. "지옥의 문 앞에서 등을 돌리지 않는 자, 지옥의 불 속에서도 눈을 감지 않는 자 그가 바로 대원본존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서원을 세우며 살고 있는가? 오늘 우리는 이 질문 앞에 서 봅니다. “나는 어떤 원願을 품고 살고 있는가?” “나의 기도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세속의 이익이나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가피암 일정스님의 생활 불교 이야기, 불교에서는 인간의 삶과 존재를 여섯 가지 세계로 구분합니다.이를 육도六道라 하며, 각각 지옥地獄, 아귀餓鬼, 축생畜生, 아수라阿修羅, 인간人間, 천상天上의 세계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러한 육도는 단지 내세의 길이 아니라, 우리 일상에서 경험하는 감정과 상태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지옥은 분노와 고통에 휩싸인 마음, 아귀는 끝없는 욕망과 허기, 축생은 어리석음과 본능에만 이끌리는 상태, 아수라는 질투와 다툼, 인간은 고통과 기쁨이 교차하는 현실로서 천상은 쾌락 속에 무상함을 잊고 살아가는 삶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육도는 우리 가족 모두가 살아가는 감정의 지도이자 삶의 거울입니다. 지장보살, 가장 낮은 곳을 먼저 찾아가는 보살로서 불교의 위대한 보살 중 한 분인 지장보살地藏菩薩은 이 육도 중에서도 가장 고통이 극심한 지옥 중생을 먼저 구제하겠다는 큰 서원誓願을 세우신 분입니다. “지옥이 텅 빌 때까지 나는 열반에 들지 않겠다.” “모든 중생이 성불하기 전에는 나 홀로 성불하지 않겠다.” 이 원력은 단순한 이상이 아니라, 누구도 외면하지 않겠다는 책임의 자비, 고통의 한가운데로 기꺼이 내려가겠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예로부터 불가에서는 “산하무애山河無碍”라 하였습니다. 크게는 삼천대천세계가, 작게는 한 사람의 마음이 본래는 막힘이 없는 진리의 흐름, 무애無碍의 세계에 있다고 말입니다. 산은 산이고, 강은 강이지만 그 흐름에는 막힘이 없습니다. 물은 산을 돌아 흐르고, 산은 물을 품어 길을 내줍니다. 그럼에도 오늘날 우리는 작은 오해에도 막히고, 작은 차이에도 멈추며, 서로를 넘지 못할 벽으로 여깁니다. 세상은 소통이 막히고, 마음은 꽉 막혀 있다 요즘 세상은 온갖 정보와 소식이 넘쳐나고, 연결된 듯 보이지만 정작 마음은 서로를 향해 굳게 닫혀 있습니다. 정치의 벽, 이념의 벽, 세대의 벽, 그리고 감정의 벽, 그리하여 말은 많고 이해는 적으며, 속도는 빠르되 방향은 흐릿합니다. 어느새 우리는 ‘산과 강처럼 흐르는 삶’이 아니라 ‘벽과 장벽처럼 고립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무애란, 단순히 막힘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산하무애”의 참뜻은 모든 차별과 경계를 뛰어넘는 자비와 지혜의 실천에 있습니다. 무애란, 산이 물을 가로막지 않듯 내가 너를 가로막지 않는 것, 물이 바위를 돌아 흐르듯 고통과 시련을 돌아 나아가는 길입니다. 타인의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진리는 짧은 한마디로 이렇게 요약됩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 차유고피유,차무고피무此有故彼有, 此無故彼無 이것이 바로 연기緣起의 가르침이며, 그 가운데에서도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진리가 바로 “상호연기相互緣起”입니다. 연기는 인연의 그물이다, 세상 모든 존재는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없습니다. 한 송이 꽃조차도 그 꽃 하나만으로 피어나는 법이 없습니다. 햇빛과 바람, 흙과 비, 벌과 나비, 농부의 손길과 시간의 인내, 모든 것이 어우러져야 비로소 한 송이 꽃이 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나”라는 것이 독립적 존재라고 착각하지만, 내가 숨 쉬는 공기, 마시는 물, 심지어 생각하는 언어조차도 수많은 인연의 산물입니다. 이처럼 모든 존재는 서로를 조건 짓고, 서로를 떠받들며 살아갑니다. 상호연기란, 함께 살아가는 존재의 방식이다. 어떤 사람이 말합니다. “나는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으니, 그저 내 마음대로 살겠다.” 하지만 이것은 연기의 눈으로 보면 무지의 말입니다. 우리가 무심코 뱉는 말 한 마디, 행동 하나가 누군가의 삶에 파문이 됩니다.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대중이여, 햇살은 차별하지 않습니다. 누구의 이마 위에나 고르게 내리며, 바람 또한 교회의 첨탑 위나 절의 지붕 위를 가리지 않고 쉼 없이 붑니다. 이것이 곧 법法의 평등성이요, 무차별 대자대비無差別 大慈大悲의 진리입니다. 고운 손 하나, 따뜻한 눈빛 하나에도 무량한 공덕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 안에 담긴 마음은 이름을 묻지 않고, 그 행위는 신분도, 종교도, 언어도 가리지 않습니다. 어떤 이는 하느님이라 부르고, 또 어떤 이는 부처님이라 부르며, 어떤 이는 아무 이름도 부르지 않지만, 굶주린 아이의 손을 잡는 순간, 우리는 모두 같은 자리에 있습니다. 그것은 이름의 자리가 아니라 자비의 자리이며, 기도의 형식이 아니라 마음의 울림입니다. 참된 나눔 앞에서는 종교도 국경도 언어도 조용히 물러납니다. 남는 것은 오직 한 사람, 사람의 자리입니다. 손을 내민 이는 신의 뜻을 전한 것이며, 그 손을 받아 든 이는 세상의 사랑을 품은 것입니다. 이것이 곧 보살행菩薩行이요, 자비의 실천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향해 무릎 꿇을 수 있다면, 그것은 굴복이나 경배가 아니라, 깊은 이해와 존중의 다른 이름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위하여 울 수 있다면,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옛날, 어느 깊은 산중에 가피암 이라는 작은 절이 있었습니다. 절 앞에는 소나무가 병풍처럼 둘러선 고요한 못이 있었지요. 맑은 날이면 그 물에 구름이 비치고, 바람이 불면 연잎이 잔잔히 흔들리는, 그야말로 세속의 번뇌를 잊게 해주는 청정도량이었다. 그 절에는 나이 지긋한 일정 스님이 살고 계셨다. 스님은 이따금 동네 아이들이나 방황하는 나그네들을 불러 차를 내어주시고, 마음을 어루만지는 법문을 들려주시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세상이 뒤흔들릴 듯한 큰 폭풍이 닥쳤다. 비는 억수같이 쏟아졌고, 바람은 산허리를 넘어 절의 기왓장을 들썩이게 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밥상도 엎어진 채로 대피했고, 어떤 이는 소중한 집을 잃었다. 절의 못가 역시 망가졌고, 아름답던 연꽃도 뿌리째 뽑혔다. 사람들의 얼굴엔 망연자실함이 가득했고,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때, 절에 피난 온 한 젊은이가 노스님께 여쭈었다. “스님, 저 연꽃도 뽑혀 나가고, 절도 망가지고, 사람들은 울고 있습니다. 도대체 왜 하늘은 이렇게 무심할까?” 일정스님은 조용히 못가로 나가셔서, 떨어진 연잎 하나를 주워들고 말씀하셨다. “저 연꽃은 진흙 속에서 피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부처님께서 사위성에 계실 때, 비구들에게 자비심慈悲心에 대해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여기 예리한 칼 한 자루가 있다고 하자. 그런데 지나가던 한 사람이 그 칼을 보고 ‘나는 이 칼을 활처럼 휘게 할 수 있다’고 하며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였다면,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그러자 한 비구가 대답하였다. “세존이시여, 날카로운 칼을 구부린다거나 휘게 만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만약 억지로 그렇게 하려 한다면, 결국 자신이 그 칼에 상처를 입고 말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그 말을 들으시고 다시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그대들이 자비심을 익히고, 반복하여 수습하며, 몸과 마음에 스며들게 한다면, 설령 누군가가 칼을 엿가락처럼 구부리려 해도 해를 입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자비심 속에 머물게 될 것이며, 더 이상 어떤 것도 두렵지 않을 것이다. 귀신이 나타난다 하여도, 마음이 흐트러지거나 동요하지 않으리라. 그때의 마음은 오직 너 자신만이 움직일 수 있는, 흔들림 없는 네 마음이 될 것이다.” 우리는 자비심의 부드럽고 따뜻한 정서를 알고 있다. 그 자비심은 개인을 넘어서 가정으로, 사회로, 국가와 세계로 확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은 선가禪家의 깊은 가르침인 “支度無難 本來無一物(지도무난, 본래무일물)”이라는 선어에서 시작합니다. 이는 “갖출 것도 어려울 것 없고, 본래 한 물건도 없다”는 뜻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우리는 흔히 말합니다. “무엇을 갖추어야 하지 않을까?” “마음을 깨끗이 하려면, 많은 공부와 고행이 필요하지 않을까?” “나는 아직 부족하니, 더 닦아야 하리라.” 하지만 선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선은 말합니다. “이미 너는 갖추고 있다. 다만 착각하고 있을 뿐이다.” 마음에 온갖 생각과 망상이 가득 차 있으면 우리는 스스로 무거워지고, 멀리 돌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지도무난이라 합니다. 도道를 이루기 위해 어려운 장비나 격식, 준비가 필요하다는 생각 자체가 이미 마음을 덮는 구름인 것입니다. 그리고 본래무일물이라 말합니다. 사람들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무언가’를 얻으려 합니다. 하지만 진리는 얻는 것이 아니라 깨닫는 것입니다. 본래 우리 마음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욕망도, 분노도, 미움도…모두는 인연 따라 생긴 거품과 같을 뿐, 실체가 없습니다. 비유 하자면, .깨달음은 맑은 하늘과 같습니다. 어린아이가 처음 세상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부모 자식 간의 인연도 전생에 수없는 공양을 올린 결과다.” 이는 인과경因果經이 전하는 대표적인 가르침이다. 단순한 혈연 관계가 아닌, 전생의 업력과 선연善緣의 결실로 맺어진 것이 바로 가족이라는 뜻이다. 불교의 대표 경전 중 하나인 인과경은 우리가 이 생에서 겪는 기쁨과 고통, 만남과 이별이 모두 과거의 원인에서 비롯된 것임을 밝히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족'은 전생의 깊은 인연이 가장 진하게 현현된 삶의 관계로 주목된다. 일정스님은 최근 법문을 통해 “가족은 업을 갚고 복을 짓는 최초의 도량”이라며, 불자들이 수행의 시작을 멀리서 찾지 말고, 가족 안에서부터 자비심과 지혜를 실천하라고 강조했다. 그는 “부모에게 공경을 다한 이는 자식으로부터 효를 받게 되며, 부부간에 믿음을 지킨 이는 다음 생에서도 좋은 인연을 맺게 된다”며, 인과경의 내용을 인용했다. 특히 부모와 자식, 부부와 형제자매 간에 생기는 갈등이나 애착, 불화 또한 과거생의 인연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를 바로 보고 선한 업으로 전환해야 다음 생에도 평화로운 인연으로 이어진다고 설명했다. “절에 가지 않아도, 가정이 도량이고 가족이 스승이며 도반이다.” 이 말은 수행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불자 여러분과 함께 법의 향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가 나눌 법의 주제는 “무시겁래無始劫來”, 곧 시작 없는 과거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어져 온 윤회의 흐름입니다. 1. 무시겁래란 무엇인가? “무시無始”란 시작이 없다는 뜻이며, “겁劫”이란 불가에서 말하는 매우 긴 시간 단위를 의미합니다. “무시겁래”란 곧 우리가 언제부터 존재했는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먼 옛적부터 생사윤회를 되풀이하며 살아왔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 생이 처음이 아니며,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이 불교의 근본적인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무시겁래로부터 수없는 몸을 받아, 부모를 바꾸고 이름을 달리하며 생사를 거듭해 왔습니다. 2. 윤회의 굴레 속에서 우리는 무시겁래 동안 업業을 짓고, 그 업에 따라 생사를 반복해 왔습니다. 때론 천상에, 때론 인간 세상에, 때론 축생계나 지옥계에 이르기까지 번뇌와 무명을 따라 흐르는 바람에 실려 흘러왔습니다. 무시겁래라 하여 시작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번뇌도 깊고 뿌리도 깊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끝없는 윤회 속에서도 부처의 씨앗, 즉 불성佛性은 한 번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3. 무시겁래의 자각은 수
법왕청신문 이준석 기자 | 불교에서는 인과응보因果應報, 즉 원인과 결과의 도리를 무엇보다 중히 여깁니다. 선을 행하면 복이 오고, 악을 행하면 화가 따른다는 이 진리는 단순한 교훈이 아니라, 우리 삶의 가장 기본이 되는 법칙입니다. 이 인과의 법은 부처님께서 깨달음으로써 중생에게 전해주신 우주의 진실한 이치입니다. 하지만 요즘 우리 사회는 어떻습니까? 이익을 위해 남을 속이고, 책임을 회피하며, 권력을 악용해 자신만의 부를 쌓으려는 사람들이 늘고 있습니다. 한탕주의, 즉 노력 없이 한 번에 큰 이익을 얻으려는 마음이 사회 전반을 뒤덮고 있으며, 종교마저도 그 흐름에 휩쓸려 권선징악의 정신을 저버리는 일이 빈번합니다. 나라가 망하려면, 그 나라의 종교부터 타락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종교가 곧 도덕의 뿌리요, 공동체의 등불이기 때문입니다. 불교가 타락하고, 불자가 인과의 법을 무시하며 탐진치貪瞋癡에 휩쓸릴 때, 사회는 더 큰 혼란과 괴로움에 빠지게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것은 마음에서 비롯되며, 마음이 바르면 말과 행동이 바르게 된다.” 우리의 삶이 어지러운 이유는 사회 구조가 아니라, 마음이 흐트러졌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삿되면 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