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사상누沙上樓閣이란 모래 위에 세운 누각, 즉 기초가 없는 허망한 것, 순식간에 무너질 것을 붙잡는 인생의 어리석음을 일깨우는 말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에도 이와 같은 경책이 있습니다. “모래 위에 짓지 말고, 반야의 반석 위에 지어라.” 지혜 없는 공덕은 쌓아도 흩어지고, 마음의 기초 없이 행하는 수행은 빛이 나도 오래가지 않습니다. 기초 없는 욕망은 사상누각이다. 사람은 모두 행복을 원합니다. 그러나 욕망을 기초로 세운 행복은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무너집니다. 명예도, 재물도, 관계도 지혜와 자비가 받쳐주지 않으면 누각처럼 높아 보이지만 모래처럼 허망한 것입니다. 칭찬에 흔들리고, 비난에 무너지고, 작은 이익 앞에서 마음을 잃는 삶. 이 모두가 사상누각의 삶입니다. 부처님은 “올바른 보는 눈, 정견正見이 모든 수행의 기초”라 하셨습니다. 마음의 기초가 바로 서면 그 위의 삶도 견고하게 세워집니다. 정견이란 곧, 업의 이치를 아는 눈 인과의 흐름을 보는 눈 무상한 세상을 꿰뚫는 지혜 이 세 가지입니다. 정견의 반석 위에 쌓은 삶은 바람이 불어도, 비가 내려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부처님께 잘 보이고자 하는 마음, 남에게 보이기 위한 공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천년향화지지千年香花之地에 자리한 벽사초불정사僻邪招佛精舍는 불교적 상징성과 현대적 공간 해석이 결합된 독특한 도량이다. 노란색에서 황금색에 이르는 계열의 외관은 단순한 색채 선택이 아니라, 부처님의 세계를 드러내는 미학적 장치이자 도량 전체의 신성성을 강화하는 상징성의 코드이다. 불교에서 황금빛은 깨달음, 지혜, 영광, 부처님의 광명을 상징한다. 사찰의 금빛 외관은 단순 화려함을 넘어, 중생의 무명을 밝히는 부처님의 광명光明 그 자체를 형상화한다. 특히 벽사초불정사에서 사용된 색은 ‘노란색黃’을 바탕으로 한 자연 계열이어서, 인위적 금칠의 과시성과는 다른 온화한 신성·전통적 불교미감을 내포한다. 이는 “화려하되 탐욕적이지 않고, 장엄하되 부담스럽지 않은” 균형을 만들어낸다. 건물의 외형은 층단형 구조로 위로 올라갈수록 가벼워지는 형태를 취한다. 이는 지혜로 올라가는 수행의 계단, 또는 삼계三界의 상승 구조를 연상케 한다. 바닥에서 정상까지 이어지는 선들은 수평과 수직이 교차하며, 정교한 규칙성을 유지한다. 그 규칙성은 불교의 법칙성法性, 우주의 질서, 연기법의 구조적 조화를 상징한다. 또한 이러한 입체 구조는 사찰의 장엄함을 강조하면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일정 스님은 최근 법문에서 고대의 성어 자승자박自繩自縛을 통해, 우리 사회가 겪는 혼탁함의 근원을 통찰하며 스스로를 돌아보는 깊은 성찰의 메시지를 전했다. 스님은 “세상 사람들 모두는 한 올의 밧줄을 손에 쥐고 살아간다”고 말문을 열었다. 그 밧줄은 집을 짓고 이웃을 돕는 선한 쓰임도 있지만, 때로는 자기 스스로 자신을 묶는 속박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스님은 자승자박의 뜻을 “남이 묶은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만든 매듭·내 욕심이 만든 속박”이라 설명하며 사회를 혼탁하게 만드는 원인을 개인의 탐욕·분노·무관심에서 찾았다. 가짜가 진짜처럼 행세하고, 정의가 뒤로 밀리며, 말은 넘쳐나지만 실천은 사라진 현실, 그러나 이러한 혼탁함은 특정 집단의 문제가 아닌, 우리 모두가 쥐고 있는 작은 매듭들의 집합이라는 지적이다. 스님은 혼탁함을 만들어내는 네 가지 매듭을 다음과 같이 짚었다. 욕심의 매듭: 더 가지려는 욕망이 결국 스스로를 옥죄는 줄이 된다. 분노의 매듭: 남을 태우기 전에 먼저 자신의 마음을 태운다. 거짓의 매듭: 진실을 누르고 선 이익은 잠시 빛나지만 결국 허상으로 돌아온다. 무관심의 매듭: 조용하지만 깊은 독으로, 사회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세존께서 기원정사에 계실 때, 세상의 더러움에 대해 이렇게 설하셨다. 옛날 어느 나라에 지주왕地主王이 있었는데, 왕에게는 자비慈悲라는 태자가 있었고, 왕의 대신 전존專尊에게는 염만焰曼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지주왕은 궁궐 안에서 향락을 즐기며 정사를 모두 전존에게 맡겼다. 전존은 모든 일을 아들 염만과 의논하여 처리했는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왕은 크게 슬퍼했다. 태자 자비가 왕에게 아뢰었다. “전존을 잃은 것은 슬프오나, 아들 염만은 더욱 지혜롭고 현명합니다. 그를 불러 나라 일을 맡기심이 옳겠습니다.” 왕은 그 말을 따랐고, 염만은 국정을 훌륭히 다스려 명성이 높아져 ‘대전존大專尊’이라 불렸다. 그러나 세상은 덧없다. 왕이 늙어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나자 태자 자비가 왕위에 올랐다. 새 왕 또한 정사를 대전존에게 맡기고 스스로는 내전에서 오욕을 즐겼다. 그는 대신들과 약속한 국토 분배조차 잊었다. 대신들이 약속을 상기시키자, 왕은 나라를 일곱 등분하여 여섯 대신에게 나누어 주는 일을 대전존에게 맡겼다. 대전존은 공정하게 국토를 나누어 주었고, 그 덕에 일곱 왕과 백성 모두가 그를 신처럼 존경하였다. 일곱 거사居士와 7백의 바라문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천년고찰 쌍계사가 새로운 주지를 맞이하며 지역 불교문화의 새로운 도약을 알렸다. 논산시(시장 백성현)는 19일 쌍계사에서 신임 주지 대륜(박찬우) 스님의 취임식이 봉행됐다고 밝혔다. 이날 취임식에는 지역 불자와 시민 등 200여 명이 함께해 쌍계사의 새로운 출발을 축하했다. 대륜 스님은 “나눔과 자비의 정신으로 시민과 함께하는 열린 사찰이 되겠다”고 밝히며, 이를 상징하는 ‘자비 나눔 쌀 전달식’을 통해 지역사회에 따뜻한 마음을 전달했다. 백성현 논산시장은 축사를 통해 “쌍계사는 오랜 세월 지역의 믿음과 전통을 이어온 논산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라며 “대륜 스님께서 시민과 함께 새로운 산사 문화를 열어주시길 기대한다”고 전했다. 참석한 시민과 불자들은 스님의 취임을 축하하며, 쌍계사가 지역과 함께 성장하는 문화공간으로 자리 잡기를 기원했다. 같은 날 쌍계사 경내에서는 국가유산청 전통산사 활용사업의 일환으로, 문화행사 ‘쌍계 마바시(쌍계사에서 마음을 바꾸는 시간)’가 열렸다. 행사에는 요들 가수 이은경, 뮤지컬·팝페라 그룹 스텔라, 팬플루트 연주그룹 팬타곤이 출연해 깊어가는 가을 정취 속에서 감동과 여운이 깃든 무대를 선보였다. 또한
법왕청신문 장규호 기자 | 옛날 어떤 마을에 큰 부자가 있었으나, 그의 마음은 재물과 함께 굳게 닫혀 있어 인색하기 그지없었다. 이를 안 부처님께서는 제도하기 위해 지혜가 으뜸인 제자 사리불을 보냈다. 사리불은 보시의 공덕과 복덕을 설했으나 부자는 마음을 열지 않았다. 이어 신통력이 뛰어난 목련이 갔지만, 그의 신통 또한 부자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고 오히려 의심만 불러일으켰다. 마침내 부처님께서 친히 부자를 불러 설법하셨다. 부처님의 광명 앞에서 절을 올린 부자에게 부처님은 물으셨다. “그대는 다섯 가지 큰 베풂, 오대시五大施를 아는가?” 부자는 알지 못한다고 대답했으나, 부처님의 설명은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그것은 재물을 내놓는 보시가 아니라, 살생하지 않음不殺生, 도둑질하지 않음不偸盜, 삿된 음행을 하지 않음不邪淫, 거짓말하지 않음不妄語, 술에 취하지 않음不飮酒이라는 기본 계율이었다. “이 오계를 지키는 것이야말로 다섯 가지 큰 보시이며, 그 이상의 보시는 따로 없다.” 부자는 크게 기뻐하며 공양을 올리려 했으나, 나쁜 옷감이 없어 어쩔 수 없이 가장 좋은 옷감을 바쳤다. 그런데 그 옷감은 끊임없이 이어져 나왔다. 이는 진심 어린 보시가 복덕을 불러오
법왕청신문 장규호 기자 | 연목구어緣木求魚는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를 구한다”는 뜻으로, 방법이 잘못되면 아무리 노력해도 성과가 없다는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삿된 길(사도邪道)에 비유합니다. 깨달음을 구하면서 탐욕과 집착에 매달리는 것은, 마치 나무 위에서 물고기를 찾는 것과 같습니다. 어느 날 제자가 부처님께 물었습니다. “저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밤낮으로 기도하고 공양을 올렸습니다. 그런데도 마음이 평안하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대는 연목구어緣木求魚하고 있구나. 깨달음은 탐욕을 채우는 기도로 오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버리고 자비와 지혜를 닦을 때 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도 연목구어의 모습이 많습니다. 교육의 병폐로 인격과 지혜를 닦는 본래의 목적은 잊고, 성적과 입시만을 좇는 교육은 나무에서 물고기를 찾는 것과 같습니다. 배움의 본질은 사라지고, 경쟁과 불안만 남습니다. 경제의 병폐는 더 큰 행복을 위해 돈을 모은다 하면서, 끝없는 탐욕과 불법적인 수단에 집착한다면, 그것은 결코 참된 풍요를 주지 못합니다. 물질이 행복의 근원이 아니라는 진리를 외면하는 길은 모두 연목구어입니다. 정치와 사회의 병폐 또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사위국 성안에 여든 살이 된 한 바라문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재산은 많았으나,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괴팍하고 인색한 사람이었습니다. 손톱만큼도 남을 위하는 마음이 없던 그는 늘 욕심과 집착 속에서 살아갔습니다. 어느 날 그는 문득, 궁전과 같은 호화로운 집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본채는 물론이고 객실, 별채, 가족이 살 건물까지 세세하게 설계하며 직접 일꾼들을 지휘하는 모습은 그에게 큰 자부심이었습니다. 노인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뽐냈습니다. “여기서 나는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하게 살 것이다. 사람들은 나를 노랭이라 비웃지만, 이 집에서 사는 나를 보고 부러워할 것이다.” 그러나 그날은 다름 아닌, 그의 수명이 다하는 날이었습니다. 노인은 알지 못했으나, 부처님께서는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부처님은 아난을 데리고 노인을 찾아가 말씀하셨습니다. “노인장, 연로하신데 이렇게 큰집을 지으시다니 피곤하지 않으십니까? 이 집을 다 지으면 무엇에 쓰시렵니까?” 그러나 노인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는 둥 마는 둥, 손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나는 지금 바쁩니다. 얘기는 다음에 듣겠습니다.” 이에 부처님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게송 한 구절을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오늘의 사자성어는 양호유환養虎遺患입니다. 글자 그대로는 “호랑이를 길러 후환을 남긴다”는 뜻입니다. 당장은 유익해 보이지만, 결국은 화를 불러올 어리석음을 경계하는 말입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이와 같은 일이 자주 일어납니다. 잠시 기분이 좋다고 탐욕을 따르고, 순간 화가 난다고 성냄을 키우며, 알아차리지 못한 채 무지를 방치합니다. 그것은 곧 내 마음속 호랑이를 기르는 일입니다. 호랑이는 어릴 때는 귀엽지만, 점점 자라면 나를 해칠 수 있습니다. 번뇌도 처음에는 사소해 보이나, 시간이 지나면 큰 업으로 자라서 나와 남을 괴롭히게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작은 악이라도 가벼이 여기지 말라. 물방울이 모여 큰 강을 이루듯, 작은 악도 쌓이면 큰 고통이 된다.” 우리가 방심하여 작은 잘못을 반복하면, 그것이 습관이 되고 결국 업이 됩니다. 바로 이것이 양호유환의 어리석음입니다. 세상 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쟁자를 무심코 돕거나, 위험한 기술을 방관하면, 그것이 훗날 나에게 큰 근심이 되어 돌아옵니다. 사회와 국가, 나아가 인류에게도 양호유환은 경계해야 할 지혜의 교훈입니다. 불자는 번뇌라는 호랑이를 기르는 대신, 그것을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바람은 그치기를 원하나, 나무는 잠잠하지 않고 흔들리고, 자식은 효도하려 하나, 부모는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효孝의 실천은 반드시 지금 해야 한다는 경책의 말씀입니다. 삶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부모님의 은혜는 바다보다 깊고, 하늘보다 높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은혜를 당연히 여기며, “언젠가 효도해야지” 하며 미루곤 합니다. 하지만 세월은 바람처럼 흘러가고, 부모님의 자리는 어느새 공허한 빈자리가 되고 맙니다. 이것이 바로 풍목지비의 슬픔입니다. 지금, 효를 실천해야 한다. 효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부모님께 안부를 묻는 한마디, 따뜻한 손길, 작은 공경심이 바로 효입니다. 오늘 실천하지 않으면 내일은 기약할 수 없습니다. 불교에서는 “一切有爲法일체유위법, 如夢幻泡影여몽환포영”이라 하여 모든 인연이 꿈과 같고, 물거품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부모님과의 인연도 지금 이 순간에만 누릴 수 있습니다. 효는 곧 불효를 끊는 길, 부처님은 부모은중경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부모의 은혜는 등에 업고 천리를 다니고, 피를 뽑아 마시게 하여도 다 갚지 못한다.” 그러니 효란 은혜를 완전히 갚는 것이 아니라, 갚으려는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사랑하는 불자 여러분, 오늘은 불교의 깊은 사상 가운데 하나인 삼신일신三身一身의 의미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三身一身삼신일신 불교에서는 부처님의 몸을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법신法身 : 진리 그 자체, 공空의 본체. 보신報身 : 깨달음의 지혜와 공덕으로 장엄한 모습. 응신應身 :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중생의 눈앞에 드러나는 부처님. 이 세 가지를 삼신三身이라 부릅니다. 그러나 이는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결국 하나의 진리, 하나의 부처님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삼신은 곧 일신, 삼신일신입니다. 千世恒今日천세항금일 “천 세대가 흘러도 오늘과 다름이 없다.” 시간은 흘러도 진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중생의 모습과 환경은 바뀌고, 나라와 세상도 변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은 늘 오늘처럼 생생합니다. 천 년 전에도 법은 지금처럼 살아 있었고, 천 년 후에도 여전히 오늘과 같이 전해질 것입니다. 이 진리의 시간을 사는 이는, 과거나 미래에 얽매이지 않고 지금 이 자리에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三身爲一身삼신위일신 다시 말해, 법신·보신·응신이 따로따로가 아니라 하나로 모아져 중생 앞에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진리를 향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어느 날, 한 바라문이 크게 화가 나 부처님을 찾아왔다. 그 이유는 그의 동족 가운데 한 사람이 부처님께 귀의하여 출가했기 때문이었다. 바라문은 분노에 휩싸여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부처님께 욕설을 퍼부었다. 부처님께서는 그를 가만히 지켜보셨다가, 그가 지쳐 언성이 잦아들고 마음이 조금 누그러진 뒤에 부드럽게 물으셨다. “바라문이여, 때로는 당신의 집에도 손님이 찾아오지요?” “예, 물론입니다.” “그럴 때 음식을 대접하기도 하지요?” “예, 그렇습니다.” “만일 손님이 그 음식을 먹지 않는다면, 그 음식은 누구의 것이 되겠습니까?” “손님이 들지 않으면, 다시 제 것이 됩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바라문이여, 바로 그것입니다. 오늘 당신은 내 앞에서 욕설을 퍼부었으나 나는 그것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그 욕설은 모두 당신의 것이 될 뿐입니다. 만약 내가 그 욕을 받아 다시 당신에게 욕을 퍼부었다면, 그것은 주인과 손님이 함께 앉아 같은 음식을 나누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음식을 원치 않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바라문은 크게 깨달음을 얻고, 부처님께 귀의하여 마침내 아라한阿羅漢, 곧 성자가 되었
법왕청신문 이준석 기자 | 대구 달서구 대구스리랑카불교사원 주지 완사스님이 영천 고경면 삼성산 자락에 새로운 불교 도량을 마련했다. 이름은 ‘한국스리랑카불교사원’으로, 지난 20여 년간 한국에서 수행하며 한국과 스리랑카 불교 발전을 위해 헌신해온 원력이 결실을 맺은 것이다. 완사스님은 1,653㎡ 규모의 옛 사찰을 구입해 리모델링을 거쳐 불사를 마무리했으며, 이로써 한국-스리랑카 불자들이 함께 모일 수 있는 신행 공간을 마련하게 됐다. 지난 24일 열린 창건법회에는 주지 완사스님과 위지트 총무 스님, 대구 삼보사 주지 동훈스님을 비롯해 은장권 함께하는 세상 이사장, 김시오 대구의료원장, 그리고 사윗트리 바나보꺼 주한 스리랑카 대사 등 100여 명의 불자와 인사들이 함께했다. 삼보사 동훈스님은 법어에서 “어려움 속에서도 불자로서의 인내와 희생으로 오늘의 결실을 이룬 완사스님과 스리랑카 불자들의 노고에 감사드린다”고 격려했다. 완사스님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할 새로운 공간이 마련되어 기쁘며, 한국과 스리랑카 불자들의 마음을 함께 담아낼 수 있는 도량이 되길 바란다”고 소감을 밝혔다. 사윗트리 바나보꺼 대사는 헌신적인 불자 13명에게 감사패를 전달하며 “한국-스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부처님께서 석가족 마을에 머무실 때의 일이다. 제자 아난이 문득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좋은 스승善知識과 좋은 벗善道伴, 그리고 좋은 제자善隨徒를 갖는 것은 성스러운 도를 수행하는 데 있어 절반을 이루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바르게 말씀드린 것입니까?” 그러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난아, 그런 말 하지 말라. 좋은 스승, 좋은 벗, 좋은 제자가 있다는 것은 도 수행의 절반이 아니라 전부이다. 그대들은 나를 좋은 벗으로 삼음으로써 생로병사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근심과 슬픔, 괴로움에서 해탈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진정한 벗을 만나는 것은 수행의 일부가 아니라 수행 전체를 관통하는 길임을 알라.” 사람은 혼자 살아갈 수 없으며, 혼자 수행할 수도 없다. 좋은 벗을 만나면 잘못된 길로 들어가지 않고, 바른 길에서 나아갈 용기와 힘을 얻는다. 반대로 나쁜 벗을 가까이하면 바른 마음이 흐려지고, 어리석음과 욕망에 이끌리기 쉽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일러주신 말씀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크나큰 울림이 된다. 좋은 벗은 단순히 함께 있는 이가 아니라, 내 마음을 깨우고 도의 길로 이끌어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우리는 흔히 묻습니다. "왜 나는 이렇게 태어났는가?" "왜 저 사람은 모든 것을 갖고 나는 아무것도 없는가?" 그러나 『논어』에도 말했듯이 死生有命, 富貴在天이라 하였습니다. 죽고 사는 것은 하늘이 내린 명(命)에 따르고, 부와 귀함은 천도天道에 달려 있다는 뜻입니다. 이는 운명을 체념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불교에서는 이것을 전생의 업業, 즉 인연과 인과因果의 결과로 이해합니다. 내가 지은 만큼 받고, 내가 뿌린 만큼 거두며, 내가 베푼 만큼 채워지는 것이 이 우주의 섭리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할 일은 단 하나입니다. 주어진 명을 원망하지 말고, 주어진 업을 탓하지 말며, 지금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해 선업善業을 짓는 것입니다. 세속의 눈으로 보면, 죽음은 두렵고, 가난은 괴롭습니다. 그러나 명命을 바로 아는 사람은 죽음조차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며, 가난조차 수행의 밭으로 삼습니다. “복은 하늘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짓는 것이다.” 진정한 부귀는 마음의 평화에서 옵니다. 참된 성공은 남과의 비교가 아니라 내면의 성장에서 비롯됩니다. 오늘 하루, 나에게 주어진 삶의 명을 감사히 여기며, 어떤 순간에도 선업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