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우리 민족에게 금강산은 단순한 산이 아니다. 그것은 곧 정신이며, 신앙이며, 예술이고, 때로는 조국의 혼 자체였다. 수많은 화가와 문인들이 금강산을 노래했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창덕궁 희정당 벽 위에 걸린 『金剛山萬物勝景圖금강산만물승경도』는 단연 압도적인 존재감을 지닌다. 조선 말기와 근대기를 대표하는 대화가 海岡 金圭鎭(해강 김규진, 1868~1933)은 52세의 원숙한 시기에 무려 8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화면 속에 금강산 일만이천봉의 기운을 담아냈다. 『金剛山萬物勝景圖』는 해강 김규진의 예술 세계가 절정에 이른 시기의 대표작으로, 창덕궁 희정당 서벽에 부착된 금강산 실경산수화의 대작이다. 특히 이 작품은 『叢石亭絶景圖총석정절경도』와 함께 서로 마주 보며 배치되어 궁궐 안에 금강산의 장엄한 기운을 펼쳐 놓은 궁중벽화의 정수로 평가받는다. 海岡해강 金圭鎭김규진의 혼을 잇고, 대한민국 채화칠기 무형문화재 제1호 靑木 金煥京청목 김환경 선생은 이 국보급 벽화를 전통 옻칠기법인 채화칠기로 다시 재현해냈다. 무려 5미터에 이르는 대작 위에 수없이 반복되는 옻칠과 건조, 채색과 연마의 과정을 거쳐 완성된 작품은 단순한 재현을 넘어선 또 하나
법왕청신문 이준석 기자 | 경기 화성 동탄 2신도시, 5월 5일 어린이날을 맞아 동탄호수공원 일대가 가족 단위 나들이객들로 붐비며 봄날의 절정을 이뤘다. 화창한 날씨 속에 공원은 사실상 ‘만원’을 이루었고, 도심 속 자연과 휴식이 어우러진 풍경이 펼쳐졌다. 이날 공원 곳곳에는 돗자리를 펴고 휴식을 즐기는 가족들, 아이들과 뛰노는 부모들, 반려동물과 산책하는 시민들까지 이어지며 긴 행렬을 형성했다. 호수를 따라 조성된 산책로와 잔디광장, 그리고 그늘을 드리운 수목 아래는 하루 종일 사람들로 가득 찼다. 특히 호수를 배경으로 펼쳐진 풍경은 단순한 공원을 넘어 ‘도심 속 휴양지’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동탄호수공원은 단순한 녹지 공간을 넘어, 도시와 자연, 삶과 여유가 공존하는 복합문화 공간으로 자리 잡고 있다. 고층 아파트 숲과 넓은 호수가 어우러진 이곳은 현대 도시가 지향하는 ‘삶의 질’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으로 평가된다. 경부고속도로 옆, 태극기가 전하는 상징성 공원 너머로 보이는 대형 태극기는 또 다른 시선을 끈다. 이 태극기는 인근 법왕사 사찰 앞에 설치된 ‘3·1운동 100주년 기념 국기 게양대’로, 높이 31m 규모로 제작되어 역사적 의미를 담고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행금산行金山’을 풀어보면, 금金의 기운이 멈추지 않고 흐르며 살아 움직이는 산이다. 따라서 이 산은 기운이 고여 있는 정지의 산이 아니라, 움직이며 순환하는 재물과 복의 산이다. 곧, 머무르는 복이 아니라 흐르며 이어지는 복의 형상이다. 풍수적으로 보아 이곳은 장풍득수藏風得水의 요건을 갖춘 자리다. 바람은 막아주고 기운은 모아주며 물은 머물게 한다. 이러한 터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히 가라앉히고, 인연과 재복을 오래도록 머물게 한다. 풍수에서 금金의 기운이 강한 산은 단순히 재물이 모이는 곳이 아니다. 결실을 맺게 하는 힘, 인생의 결과를 완성시키는 힘. 수행의 마침표를 찍게 하는 자리다. 그래서 행금산은 어떤 시작의 산이 아니라, 완성과 귀결의 산이라 할 수 있다. 이 산의 기운은 특히 사찰과 수행 공간과 깊은 인연을 맺는다. 금金은 정리와 깨달음의 기운이며, 행行은 수행과 실천을 뜻하기 때문이다. 결국 행금산은 수행이 결실로 바뀌는 자리다. 담화총사 법문 한 줄 “행금산은 복을 쌓는 산이 아니라, 쌓인 복이 열매로 드러나는 산이다.” 행금산의 기운은 벽사초불정사와 같은 도량과 만날 때 비로소 그 참된 의미를 드러낸다. 이곳은 복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세상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지만, 인간의 고통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반복되고 있다. 배고픔, 질병, 고립, 억압, 가난, 그리고 차별, 이 모든 것은 시대가 바뀌어도 사라지지 않는 인류의 숙명과도 같은 문제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고통을 단순히 바라보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우리는 행동해야 하고, 동시에 기도해야 한다. 기도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가장 강력한 힘이다. 옛 성현들은 기도를 통해 산을 움직일 수 있다고 하였고, 자연의 법칙마저 멈출 수 있다고 하였다. 이 말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인간의 마음과 의지가 얼마나 큰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일깨우는 깊은 가르침이다. 우리는 흔히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한다. 그러나 진정한 기도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굶주린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보다, 그들을 굶주리게 만든 이들을 위해 더 깊이 기도해야 한다. 병든 이를 위해 기도하는 것보다, 그들을 돌보지 않는 이들을 위해 더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외로운 이를 위해 기도하는 것보다, 그들을 외면한 이들을 위해 더 크게 기도해야 한다. 왜냐 하면 고통의 근원은 단순한 상황이 아니라, 인간의 무관심과 이기심에서 비롯되기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행금산行金山’을 풀어보면, 금金의 기운이 멈추지 않고 흐르며 살아 움직이는 산이다. 따라서 이 산은 기운이 고여 있는 정지의 산이 아니라, 움직이며 순환하는 재물과 복의 산이다. 곧, 머무르는 복이 아니라 흐르며 이어지는 복의 형상이다. 풍수적으로 보아 이곳은 장풍득수藏風得水의 요건을 갖춘 자리다. 바람은 막아주고 기운은 모아주며 물은 머물게 한다. 이러한 터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히 가라앉히고, 인연과 재복을 오래도록 머물게 한다. 풍수에서 금金의 기운이 강한 산은 단순히 재물이 모이는 곳이 아니다. 결실을 맺게 하는 힘, 인생의 결과를 완성시키는 힘. 수행의 마침표를 찍게 하는 자리다. 그래서 행금산은 어떤 시작의 산이 아니라, 완성과 귀결의 산이라 할 수 있다. 이 산의 기운은 특히 사찰과 수행 공간과 깊은 인연을 맺는다. 금金은 정리와 깨달음의 기운이며, 행行은 수행과 실천을 뜻하기 때문이다. 결국 행금산은 수행이 결실로 바뀌는 자리다. 담화총사 법문 한 줄 “행금산은 복을 쌓는 산이 아니라, 쌓인 복이 열매로 드러나는 산이다.” 행금산의 기운은 벽사초불정사와 같은 도량과 만날 때 비로소 그 참된 의미를 드러낸다. 이곳은 복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충북 청주 미원면의 고요한 산자락에 자리한 벽사초불정사辟邪招佛精舎는 이름 그대로 “사악함을 물리치고 부처를 맞이하는 도량”이다. 이곳은 단순한 사찰을 넘어, 천년의 향화가 이어질 성지, 곧 ‘천년향화지지千年香火之地’로서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가고 있다. “들어설 때는 벽사, 머무르면 초불” 벽사초불정사의 가장 깊은 메시지는 단순하다. “이곳에 들어설 때는 ‘벽사’라 말하고,이곳에 머무를 때는 ‘초불’이라 부를지어다.” 이는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수행의 길이다. 문을 들어설 때는 세속의 번뇌와 업장을 끊고辟邪 머무는 순간에는 부처를 맞이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라招佛 즉, 이곳은 공간이 아니라 마음을 바꾸는 ‘전환의 도량’이다. 천년의 뜰, 불자전용 봉안당 벽사초불정사에는 특별한 공간이 있다. 바로 “불자전용 천년의 뜰 봉안당”이다. 이 봉안당은 단순한 안치 공간이 아니다. 부처님의 가르침 아래에서 영원한 안식과 공덕이 함께하는 성스러운 자리다. 천년 향화가 이어지는 기도 공간 가족의 인연을 이어주는 영속의 자리 수행과 추모가 하나 되는 도량 삶과 죽음이 분리되지 않고, 하나의 연기로 이어지는 불교적 세계관이 그대로 구현된 공간이다. 우담바
법왕청신문 이준석 기자 | 사람은 누구나 길 위에 서 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우리는 이미 떠나는 존재이며, 어디론가 향하고 있는 존재다. 고향을 떠나 도시로, 도시를 떠나 또 다른 삶으로, 사람은 끊임없이 옮겨 다닌다. 그래서 어떤 이는 말한다. “나는 늘 떠돌아다니는 인생이다.” 그러나 과연 떠돌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아직 머물 곳을 몰라 헤매고 있는 것일까. 머무는 곳이 곧 고향이다. 우리는 흔히 고향을 과거로 생각한다. 태어나고 자란 곳, 어릴 적 기억이 남아 있는 장소를 고향이라 부른다. 그러나 삶은 뒤로 돌아가지 않는다. 고향은 기억 속에 남을 뿐, 지금의 삶을 살아주지는 않는다. 불가에서는 말한다. “지금 머무는 그 자리가 곧 도량이다.” 지금 서 있는 자리, 지금 숨 쉬는 이 순간, 지금 마주한 인연 속에서 우리는 이미 ‘머물고’ 있다. 그렇다면 고향은 먼 곳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 이 마음 속에 있다. 떠돌음은 몸이 아니라 마음이다. 사람이 떠도는 이유는 몸이 움직여서가 아니다. 마음이 머물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 곳에 있어도 불안하고, 무엇을 가져도 만족하지 못하고, 어디에 있어도 ‘여기가 아니다’라고 느낄 때, 그때 우리는 비로소 떠돌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세상은 늘 수많은 소리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사람의 말, 감정의 흔들림, 욕망의 속삭임이 서로 뒤엉켜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인지조차 분간하기 어려운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종 거짓을 진실이라 믿고, 진실을 외면한 채 스스로의 착각 속에서 길을 잃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진실을 진실로 알고, 진실이 아닌 것을 진실이 아님으로 아는 사람, 그는 마침내 올바른 진실을 깨닫게 된다.” 이 가르침은 단순한 지식이 아닙니다. 삶을 바꾸는 지혜이며, 마음을 밝히는 등불입니다. 어느 날, 한 어린 동자가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스승님, 진실은 어디에 있습니까?” 스승은 미소 지으며 대답했습니다. “진실은 멀리 있지 않다. 다만 네가 보고 싶지 않은 곳에 있을 뿐이다.”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습니다. 자신에게 유리한 것은 진실이라 여기고, 불편한 것은 거짓이라 밀어냅니다. 이것이 바로 무명無明입니다. 진실을 가리는 가장 큰 장애는 세상이 아니라 바로 자기 마음입니다. 법화경은 말합니다. 모든 중생은 본래 부처의 성품을 지니고 있으며, 그 성품은 진실을 향해 있습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사람의 마음은 늘 두 가지에 붙들려 있습니다. 하나는 망상妄想이고, 또 하나는 혼침昏沈입니다. 망상은 생각이 흩어지는 것이고, 혼침은 마음이 가라앉아 잠으로 빠지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수행자의 가장 큰 장애입니다. 그중에서도 혼침, 즉 잠에 빠지는 것은 마음을 어둡게 하고, 지혜의 등불을 꺼뜨리는 가장 빠른 길입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이 어둠을 깨는 가장 쉬운 방편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바로 고성염불高聲念佛입니다. 조용히 속으로만 염불하면 마음은 쉽게 흐려지고, 몸은 점점 무거워져 잠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소리를 높여 또렷하게, 힘 있게 염불하면 그 소리는 곧 자신의 정신을 깨우는 종소리가 됩니다. 큰 소리로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는 순간, 귀로 그 소리를 다시 듣게 됩니다. 이때 일어나는 것은 단순한 발성이 아닙니다. 입은 부처를 부르고 귀는 그 소리를 듣고 마음은 그 소리에 집중합니다 이 세 가지가 하나로 모이면 흩어졌던 정신이 한순간에 모이고 잠은 설 자리를 잃게 됩니다. 잠이 온다는 것은 몸이 피곤해서가 아니라 마음이 흐려졌기 때문입니다. 고성염불은 그 흐림을 깨뜨립니다. 마치 어두운 방에 불을 밝히면 어둠이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불교의 모든 가르침을 한 줄로 묶는다면 어디에 닿을까. 수많은 경전과 논서, 선사의 어록과 법문이 서로 다른 언어로 같은 곳을 가리키고 있다면, 그 중심에는 무엇이 놓여 있는가. 나는 그 물음의 답을 묘법연화경, 그중에서도 방편품 제2의 한 구절에서 본다. 부처는 중생으로 하여금 자신의 지견(知見)을 열게 하고(開), 보여주며(示), 깨닫게 하여(悟), 마침내 그 길에 들게 한다(入)고 하였다. 이 네 글자는 교학의 문장인 동시에 수행의 지도이며, 존재의 구조를 해명하는 철학이자 삶의 윤리다. 나는 이 네 글자를 하나의 창(窓)으로 삼아, 담화선창이라 이름 붙인다. 창은 밖을 보게 하고, 동시에 안을 비춘다. 그 창을 통해 우리는 부처를 바라보지만, 끝내는 우리 자신을 보게 된다. 첫째, 열림(開)이다. 인간은 스스로를 닫아놓은 존재다. 우리는 세상을 향해 열려 있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익숙한 관념과 판단, 두려움과 욕망으로 촘촘히 짜인 울타리 안에 머문다. 그 울타리는 외부의 적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는 동시에, 진실로부터 우리를 가둔다. 부처의 가르침은 이 울타리를 부수려 하지 않는다. 다만 문이 있음을 일깨운다. 문은 언제나 안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우주의 진리는 큰 북과 같다. 크게 치면 큰 소리가 나고, 작게 치면 작은 소리가 난다. 이 한마디는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사회적 관계와 삶의 구조를 꿰뚫는 깊은 법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좋은 결과를 원한다. 인정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고, 존중받고 싶어 한다. 그러나 정작 자신이 세상에 어떤 ‘소리’를 내고 있는지는 돌아보지 않는다. 북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강하게 치면 강하게 울리고, 약하게 치면 약하게 울린다. 세상 또한 다르지 않다. 내가 남을 대하는 태도, 말의 무게, 행동의 깊이, 그 모든 것이 결국 나에게 되돌아오는 울림이 된다. 거친 말로 세상을 대하면, 세상은 거친 소리로 응답한다. 이기적인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면, 결국 고립이라는 메아리가 돌아온다. 반대로 따뜻한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면, 그 온기는 반드시 다시 나에게 돌아온다. 이것이 인과因果다. 이것이 우주의 질서다. 오늘날 사회를 보면, 큰 소리를 내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깊은 울림을 가진 사람은 드물다. 소리는 크다고 해서 울림이 깊은 것이 아니다. 진정한 울림은 ‘진심’에서 나온다. 작게 말해도 마음이 담기면 멀리 퍼지고, 크게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한켠, 가을빛 낙엽 사이로 강렬한 붉은 원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단순한 형태지만 결코 단순하지 않은 이 조형물은 인도네시아 조각가 아르소노(Arsono)의 작품 「원(Circle)」이다. 철로 이루어진 이 거대한 원은 자연과 인간, 시간과 존재를 하나로 잇는 상징적 언어로 서 있다. 1940년 2월 7일, 인도네시아 욕야카르타에서 태어난 아르소노는 미술아카데미에서 조각을 전공하며 예술적 기반을 다졌다. 이후 인도네시아를 중심으로 아시아 각국에서 개인전을 개최하며 독자적인 조형 세계를 구축해왔다. 특히 그는 공공미술 영역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도시 공간 속에서 인간의 사유를 확장시키는 작품들을 꾸준히 선보여왔다. 현재는 자카르타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의 작품 「원」은 높이 200cm, 폭 60cm, 길이 200cm 규모의 철 구조물이다. 붉은 색채로 강조된 이 원형 조형은 내부에 기하학적 구조를 품고 있어, 보는 각도에 따라 전혀 다른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외형은 완전한 원이지만, 내부는 비어 있고 동시에 채워져 있다. 이 대비는 ‘존재와 공(空)’이라는 동양적 사유를 떠올리게 한다. 특히 이 작품이 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