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왕청신문 김학영 기자 | 고령사회와 핵가족화가 동시에 진행되는 오늘날, 장묘 문화는 더 이상 개인이나 가족의 선택 문제에 머물지 않는다. 이는 복지, 도시 구조, 세대 관계가 맞물린 공공의 과제다. 과거 선산 중심의 매장 문화는 관리 주체의 소멸, 접근성 문제, 환경 부담이라는 현실 앞에서 한계를 드러냈다. 화장과 산골이 대안으로 제시되었지만, ‘기억이 머무를 자리’가 사라진다는 또 다른 공백을 남겼다. 이 지점에서 사찰 봉안당은 단순한 종교 시설을 넘어 현실적이고 지속 가능한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다. 봉안은 사적 선택이 아니라 공적 안정 장치다. 사찰 봉안은 유골의 안치 문제가 아니라 관리의 지속성에 대한 해법이다. 공익법인 사찰이 직접 운영하는 봉안당은 운영 주체의 안정성, 장기 관리 가능성, 분쟁 최소화라는 측면에서 일반 민간 시설과 분명한 차이를 가진다. ‘천년의 뜰’은 개인 계약 중심의 시설이 아니라, 도량이라는 공적 구조 속에 봉안을 위치시킨 사례다. 이는 사후 관리의 책임을 가족에게만 전가하지 않고, 공동체가 분담하는 방식이다. 핵가족 시대, 봉안은 새로운 효의 형태다. 자녀 수는 줄고, 가족은 흩어졌다. 전통적 기제사와 성묘를 유지하기 어려운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다음의 글은 1989년, 팔공산 갓바위에서 100일 기도 중에 받은 법문이다. 말은 고전적이지만, 그 뜻은 지금도 살아 있다. “천하에 영웅적 격령과 신념으로 만민의 총화융흥을 이루고, 행체광념과 열기화양하여 재물이 대덕하고, 수공령만하면 인간의 보배로서 특의한 선도존념을 지니게 되어 만사태평화 복덕지격이 이루어질 것이다.” 己巳年 正月 二十三日 팔공산 갓바위에서 법명 光德, 大松-曇華總師 이 글의 핵심은 분명하다. 신념이 바로 서면 삶의 기운이 바뀌고, 그 기운이 덕과 복으로 회향된다는 가르침이다. 팔공산 갓바위의 효험, 왜 ‘기도처’가 되는가 팔공산 갓바위는 예로부터 “한 가지 소원은 꼭 들어준다”는 말로 알려져 왔다. 이 믿음은 단순한 전설이 아니다. 갓바위 부처님은 관봉 석조여래좌상으로, 머리에 갓을 쓴 듯한 바위 형상이 특징이다. 그러나 불자들이 이곳을 찾는 이유는 형상보다 기도의 축적 때문이다. 수백 년 동안 이어진 발원, 참회, 서원, 회향의 마음이 이 자리에 층층이 쌓였다. 그래서 갓바위의 효험은 “무엇을 달라”는 기복을 넘어서 마음을 바로 세우는 힘으로 전해진다. 호신불이란 무엇인가 - 몸을 지키는 부처가 아니라,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백면서생이라 한다. 흰 얼굴에 글만 익힌 사람. 경전은 줄줄 외우되, 삶의 흙먼지는 묻히지 않은 이다. 불교에서도 오래전부터 이런 공부를 경계해 왔다.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말로 아는 법은 법이 아니요, 몸으로 살아낸 법만이 법이다.” [담화총사 : 네이버 동영상 2,500개 바로보기] 경을 천 번 읽고도 분노 하나 다스리지 못한다면 그 지식은 아직 종이 위에 있다. 선문에서 이를 구두선口頭禪이라 부른다. 입으로만 하는 선, 몸은 움직이지 않는 깨달음이다. 백면서생의 공부는 머리에서 멈춘다. 생각은 많으나 고통을 건너본 적이 없고, 판단은 빠르나 책임을 져본 적이 없다. 그래서 말은 옳으되, 사람은 움직이지 않는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언제나 행行으로 완성된다. 신해행증信解行證이라 했다. 믿고, 이해하고, 반드시 걸어가 보아야 증득이 된다. 산문을 나서 본 적 없는 수행은 아직 수행이 아니다. 중생의 소리를 듣지 않은 깨달음은 아직 자비가 아니다. 현장 없는 지혜는 바람 없는 깃발과 같다. 그래서 선사들은 말한다. “백 권의 책보다 한 번의 넘어짐이 낫다.” 무릎에 흙을 묻히고, 손에 상처를 얻을 때 비로소 법은 혈육이 된다. 백면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우리는 언젠가 부모를 떠나보내야 합니다. 하지만 더 어려운 일은 그 이후입니다. 어디에서 부모를 기억할 것인가, 어떻게 마음을 이어갈 것인가. 효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조용해졌고, 방식이 달라졌을 뿐입니다.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불교 신자들 사이에서 조용하지만 깊이 있는 봉안 공간을 찾는 수요가 늘고 있다. 단순히 유골을 모시는 시설이 아니라, 기도가 이어지고 수행의 향기가 머무는 자리를 원하기 때문이다. 이런 흐름 속에서 충북 청주에 자리한 천년향화지지千年香火之地, 벽사초불정사 ‘천년의 뜰’ 봉안당이 불자 전용 프리미엄 봉안당으로 주목받고 있다. “절 안에 있는 봉안당, 그래서 다릅니다” ‘천년의 뜰’은 이름 그대로 천 년 동안 향과 기도가 이어지는 도량을 지향한다. 일반 납골시설과 달리, 사찰 경내 정심원正心院 안에 조성된 봉안당으로, 스님들의 기도와 법회, 불공이 일상처럼 이어진다. 관계자는 “불자분들께서 가장 안심하는 부분은 ‘사람이 오지 않아도 기도가 끊기지 않는 곳’이라는 점”이라고 설명한다. 불자 전용 봉안당, 수행과 추모가 함께하는 공간 ‘천년의 뜰’은 불자 전용 봉안당으로 운영된다. 봉안과 동시에 영구 위패 봉안이 가능하며, 법회·천도재·추모 기도가 체계적으로 이어진다. 특히 뒷산에는 걷기 명상 산책로와 좌선대가 마련돼 있어, 유가족과 후손들이 찾아와 자연스럽게 수행과 추모를 함께할 수 있다. “나무 아래 앉으면 그 자리가 곧 금강좌요, 걸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지족안분知足安分, 지족知足은 포기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안분安分은 꿈을 접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말하는 지족안분이란, 지금의 나를 인정하면서, 욕심에 끌려가지 않는 삶의 태도입니다. 우리는 흔히 말합니다. “조금만 더 있으면 만족하겠다.” 그러나 그 ‘조금’은 늘 다음으로 미뤄집니다. 욕심은 채워질수록 기준을 바꾸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족함을 아는 자는 비록 누추한 곳에 있어도 편안하고, 족함을 모르는 자는 천상에 있어도 괴롭다.” 지족은 멈춤이 아니라 깨달음입니다. 이미 가진 것을 세어보는 지혜입니다. 유튜브 불교연합방송 바로가기 안분은 체념이 아니라 균형입니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몫을 알고, 그 몫 안에서 책임을 다하는 자세입니다. 생활 속 지족안분은 거창하지 않습니다. 남과 비교하지 않는 것. 비교가 시작되는 순간, 만족은 사라집니다. 지금의 형편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 형편은 인연일 뿐, 나의 값어치가 아닙니다. 할 수 없는 일을 억지로 쥐려 하지 않는 것. 그 손을 비워야, 해야 할 일이 분명해집니다. 지족안분의 삶은 적게 가지는 삶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내려놓는 삶입니다. 그래
법왕청신문 이준석 기자 | 바쁜 일상 속에서 우리는 자주 한쪽으로 치우친 선택을 합니다. 서두르다 놓치고, 옳다고 믿으며 상처를 남기고, 맞서다 보니 서로 멀어집니다. 이럴 때 부처님의 가르침은 삶의 속도를 늦추기보다 방향을 바로 잡으라고 일러줍니다. 오늘의 법문은극단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치우침 없는 지혜와 조화로운 마음의 길을 전하는 중도원융中道圓融의 이야기입니다. 중도원융은 치우치지 않는 중도의 길이 모든 것을 원만하게 어우른다는 뜻이다. 이 말은 타협하라는 말도, 중간만 취하라는 말도 아니다.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중도는 양극을 초월한 깨어 있는 선택의 길이다. 유튜브, 불교연합방송 바로가기 현대사회는 늘 극단으로 흐르기 쉽다. 빨라야 옳고, 강해야 살아남으며, 이기지 못하면 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의견은 둘로 갈리고, 사람은 편을 나누며, 조금만 다르면 적이 된다. 이럴수록 중도원융은 낡은 말이 아니라 지금 가장 필요한 지혜가 된다. 중도는 우유부단함이 아니다. 옳고 그름을 흐리는 회색지대도 아니다. 중도란 상황을 끝까지 바라보고, 집착을 내려놓은 뒤 선택하는 길이다. 그래서 중도는 느려 보이지만, 가장 정확하다. 강함과 부드러움, 전통과 변화,
법왕청신문 장규호 기자 | 신해행증의 수행 체계, 만공 스님의 “믿고, 알며 철저히 수행하며 스스로 도달하라”는 법어는 불교 수행의 완전한 체계를 간결하게 제시한다. 이는 신해행증(信解行證), 즉 믿음(信), 이해(解), 실천(行), 증득(證)의 네 단계를 말한다. 불교 수행은 맹목적 신앙도 아니고 단순한 지적 이해도 아니며, 이 네 가지가 균형있게 발전할 때 완성된다. 현대사회는 지식과 정보의 시대이지만, 진정한 지혜와 깨달음은 부족하다. 많은 사람들이 불교에 대해 알지만, 실제로 수행하고 체험하는 사람은 적다. 또한 맹목적 신앙이나 형식적 의례에 머물러 본질을 놓치는 경우도 있다. 만공 스님의 가르침은 이러한 편향을 경계하고, 완전하고 균형잡힌 수행의 길을 제시한다. 신해행증의 단계와 실천 신(信), 즉 믿음은 불교 수행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이것은 맹목적 믿음이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이 진리임을 신뢰하는 것이다. 『화엄경』에서는 “믿음은 도의 근원이요 공덕의 어머니”라고하여, 신심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무엇을 믿는가? 첫째, 삼보(三寶), 즉 부처님과 가르침과 승가를 믿는다. 둘째, 인과(因果)의 법칙을 믿는다. 선한 행위는 선한 결과를, 악한 행위는
법왕청신문 이준석 대기자 | 서로 나누고 베푸는 오늘입니다. 이 말 한마디에 이미 수행의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무엇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아주 분명하고도 자비롭게 일러주셨습니다. 명예를 얻고자 한다면 계율을 지키고, 재물을 얻고자 한다면 보시를 행하고, 덕망이 높아지고자 한다면 진실한 삶을 살고, 좋은 벗을 얻고자 한다면 먼저 은혜를 베풀어라. 유튜브 불교연합방송 바로가기 이 말씀은 세상의 계산법을 가르치기 위함이 아닙니다. 삶의 질서를 바로 세우는 법을 알려주는 가르침입니다. 먼저, 명예와 계율입니다. 명예는 스스로 포장해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말보다 행동이 앞서고, 유혹 앞에서도 선을 지키는 사람에게 자연스레 따르는 것이 명예입니다. 계율은 억압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보호하는 울타리입니다. 욕망이 흔들 때마다 기준을 세워주는 힘이 계율이며, 그 힘이 쌓여 사람의 신뢰가 됩니다. 재물과 보시는 더욱 역설적입니다. 사람들은 재물을 얻기 위해 움켜쥐지만, 부처님은 내어놓을수록 흐른다고 하셨습니다. 보시는 단지 돈을 나누는 일이 아닙니다. 시간과 마음, 말 한마디의 친절까지도 보시입니다. 보시는 재물을 늘리기 위한 기술이 아니라, 결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사람들은 흔히 묻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부유해질 수 있습니까?” 이 질문 속에서 말하는 부유함은 대개 돈이 많고, 집이 넓고, 여유가 있는 삶일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부유富有는 지갑의 두께가 아니라 마음의 깊이를 뜻합니다. [담화총사 : 네이버 동영상 2,500개 바로보기] 그래서 불교에서는 부유만덕富有萬德이라 말합니다. “참으로 부유한 이는 만 가지 덕을 갖춘 사람이다.” 덕이 없는 부유는 오래가지 않는다. 재물은 쌓일 수 있지만, 덕이 없으면 흩어집니다. 말이 거칠고, 사람을 이용하고, 자기 이익만 앞세우면 아무리 많은 것을 가져도 그 삶에는 늘 불안이 따릅니다. 부처님은 이를 무덕부無德富라 하셨습니다. 겉은 풍족하나, 속은 늘 결핍된 상태입니다. 덕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삶을 지탱한다. 덕이란 무엇입니까? - 남의 입장을 한 번 더 헤아리는 마음 - 손해를 보더라도 도리를 지키는 태도 - 말 한마디를 삼키는 인내 - 가진 것을 나눌 줄 아는 여유 - 이 모든 것이 덕입니다. 덕은 통장에 기록되지 않지만, 사람의 마음에 남고 시간이 지나 다시 돌아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말합니다. 덕은 가장 안전한 자산이라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사찰의 이름에 담긴 이 문장은 벽사초불정사辟邪招佛精舍가 지향하는 세계관을 함축한다. ‘벽사辟邪’는 삿됨을 물리친다는 뜻이며, ‘초불招佛’은 부처님의 기도와 자비를 맞이하고 모신다는 의미다. 이 이름 속에는 단순한 명칭을 넘어, 삶과 죽음, 수행과 안식이 함께 머무는 도량을 향한 선조들의 간절한 염원이 새겨져 있다. 충북 청주 깊은 산자락에 자리한 벽사초불정사는 세월의 풍파 속에서도 제자리를 지켜온 천년향화지지千年香火之地다. 속세의 번뇌를 내려놓고 마음을 씻는 이곳은, 기도와 수행이 일상이 되는 영험한 공간으로 수많은 불자들에게 위안과 깨달음의 길을 제시해왔다. 사찰의 이름에 담긴 이 문장은 벽사초불정사辟邪招佛精舍가 지향하는 세계관을 함축한다. ‘벽사辟邪’는 삿됨을 물리친다는 뜻이며, ‘초불招佛’은 부처님의 기도와 자비를 맞이하고 모신다는 의미다. 이 이름 속에는 단순한 명칭을 넘어, 삶과 죽음, 수행과 안식이 함께 머무는 도량을 향한 선조들의 간절한 염원이 새겨져 있다. 충북 청주 깊은 산자락에 자리한 벽사초불정사는 세월의 풍파 속에서도 제자리를 지켜온 천년향화지지千年香火之地다. 속세의 번뇌를 내려놓고 마음을 씻는 이곳은, 기도와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세상은 늘 편을 가르려 합니다. 내 편과 네 편, 옳고 그름 이전에 서로의 자리를 먼저 나눕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길은 언제나 그 한가운데에 서 있었습니다. 치우치지 않고, 무리에 휩쓸리지 않는 자리. 그 자리를 가리켜 우리는 무편무당無偏無黨이라 부릅니다. 무편무당이란, 아무 생각도, 아무 입장도 가지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깨어 있는 태도입니다. 치우침은 마음이 먼저 결론을 내릴 때 생기고, 무리는 생각을 대신해 판단해 줄 때 만들어집니다. 그 순간, 우리는 편해지지만 진실에서는 멀어집니다. 부처님께서는 “중도는 양쪽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양쪽을 다 살피는 지혜”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무편무당은 옳고 그름을 가리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사람이 아니라 사안을 보고, 감정이 아니라 인연을 살피라는 가르침입니다. 오늘의 사회를 비추는 무편무당 오늘 우리는 의견보다 진영을 먼저 묻고, 사실보다 소속을 먼저 확인합니다. 그러나 불교의 눈으로 보면 그 순간부터 갈등은 시작됩니다. 무편무당의 사람은 누구의 말인지보다 무슨 말인지를 듣고, 어느 편인지보다 얼마나 고통이 있는지를 봅니다. 그래서 중재자가 되고, 그래서 신뢰가 생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