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1914년 10월 10일, 제주도 서귀포시 도순동,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이고 산방산의 기운이 서린 그 땅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이천 서씨 가문에서 태어난 그 아이는 훗날 ‘한 마리 큰 새’, 곧 세계를 날아오를 수행자가 된다. 법호 일붕一鵬 한 마리 붕새라는 이름은, 마치 그의 삶 전체를 미리 예언한 듯했다. 어린 시절 한학을 익히고, 집안의 뜻에 따라 16세에 혼인도 했지만 그의 마음은 일찍부터 세속에 머물지 않았다. 삶의 근원에 대한 질문, 존재의 본질에 대한 물음이 늘 그를 다른 길로 이끌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결단의 시간이 찾아왔다. 산방굴사의 새벽, 출가 1932년, 열아홉의 서경보는 제주 산방산 기슭 산방굴사山房窟寺 광명암에서 강월姜慧月 화상을 은사로 출가했다. 세속의 이름을 내려놓고 받은 법명은 회암悔巖산방산의 바람과 바위, 그 고요한 굴사에서 한 청년은 수행자의 길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러나 그의 구도는 제주에 머물지 않았다. 1933년 화엄사에서 진진응 강백을 찾아 수학했고, 1935년에는 완주 위봉사 강원에서 사미과·사집과를 졸업했다. 이때 위봉사 주지 춘담 스님은 그를 법제자로 삼으며 새로운 법호를 내려준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요즘 청년 불자들은 종종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나는 불자인가, 그냥 절에 가는 사람인가.” 바쁘고, 흔들리고, 마음은 늘 알림 소리에 쫓깁니다. 수행은 멀게 느껴지고, 죽음과 봉안 이야기는 더더욱 내 얘기가 아닌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불교는 언제나 묻습니다. “지금, 네 마음은 어디에 머물러 있느냐.” 불경에 나오는 연화동자는 깨달음을 외치지 않았습니다. 대단한 수행을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흔들리지 않는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줄 알았을 뿐입니다. 연꽃 위에 앉은 아이처럼 진흙 속에서도 마음을 잃지 않는 것, 그게 수행이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이 땅에 일붕 초대법왕이 계셨습니다. 법왕께서는 산속에만 머무르지 않으셨습니다. 세상 한가운데로 들어와 더 고요해지는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세상이 시끄러울수록 마음은 더 조용해야 한다.” 이 말은 오늘을 사는 청년 불자에게 유난히 깊게 다가옵니다. 그리고 지금, 그 가르침을 이어 담화총사는 하나의 질문을 던집니다. “신행은 어디까지 이어질 수 있는가.” 그 답이 벽사초불정사 ‘천년의 뜰’입니다. 천년의 뜰은 ‘죽음을 준비하는 공간’이 아닙니다. 오히려 삶의 태도를 묻는 자리입니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불교에서 신행이란 절에 다니는 횟수가 아니라 삶의 태도를 부처님 법에 맡기는 일이다. 그래서 불자는 삶의 끝에서도 신행을 멈추지 않는다. 옛 경전에 연화동자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연꽃 위에 앉아 태어난 아이,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도 마음을 먼저 고요히 두었던 존재. 연화동자는 깨달음을 말하지 않았다. 다만 흔들리지 않는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았을 뿐이다. 그 고요한 관조가 곧 수행이었고, 그 삶 자체가 법문이었다. 세월이 흘러 이 땅에 일붕 초대법왕이 계셨다. 법왕께서는 권위로 가르치지 않으셨고, 말로만 법을 전하지 않으셨다. 혼란의 시대 속에서도 분별보다 관조를, 분노보다 자비를 택하셨다. 법왕께서 평생 강조하신 것은 화려한 수행이 아니라 정관靜觀, 곧 고요히 보고 깊이 관하는 수행이었다. “마음이 고요하면 생사 또한 두려울 것이 없다.” 이 말은 삶뿐 아니라 죽음 이후까지 꿰뚫는 가르침이었다. 그리고 그 법맥을 이어 오늘을 살아가는 수행자가 있다. 제자 담화총사다. 담화총사는 스승의 가르침을 말이 아닌 공간과 실천으로 이어가고자 했다. 그 결실이 바로 벽사초불정사 ‘천년의 뜰’이다. 천년의 뜰은 봉안을 위한 시설이 아니다. 이곳
법왕청신문 김학영 기자 | 어머니의 숨결이 멎던 날, 나는 비로소 알았다. 사람의 생은 끝나도, 마음은 쉽게 떠나지 않는다는 것을, 사진 속 미소는 시간이 지나 빛이 바래지만, 그 미소를 떠올리는 마음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살아 있다. 그래서 우리는 문득 아무 이유 없이 부모의 이름을 부른다. 요즘 젊은 세대에게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말은 부담으로 들릴지도 모른다. 바쁜 삶, 좁아진 공간, 흩어진 가족 속에서 조상을 모신다는 일은 점점 멀어진 풍경이 되었다. 그러나 제사의 본래 뜻은 형식이 아니라 마음을 다시 모시는 일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제사를 지낼 때 반드시 위패를 모셔 예를 올린 뒤, 다시 본래의 자리로 모시는 것을 중히 여긴다. 이를 반혼재返魂齋라 한다. 혼을 불러와 예를 다하고, 다시 평안히 돌아가시도록 보내는 의식이다. 위패는 나무 조각이 아니다. 그것은 부모의 이름이 쉬는 자리, 자식의 마음이 돌아오는 좌표다. 제사를 마친 뒤 위패를 아무렇게나 두지 않고 다시 봉안하는 이유는, 부모의 혼이 늘 평안히 머물도록 자식의 마음을 바로 세우기 위함이다. 그래서 우리는 봉안당을 찾는다. 눈물 대신 향을 피우고, 후회 대신 기도를 올리며,부처님
법왕청신문 김학영 기자 | 불교에서 말하는 覺悟解脫각오해탈은 수행의 완성이자 삶의 태도를 가르는 기준이다. ‘깨닫고 번뇌에서 벗어난다.’ 이 말은 고통이 사라진 세상을 약속하지 않는다. 고통에 끌려다니지 않는 자유를 가리킨다. 사람들은 흔히 해탈을 현실을 떠나는 일로 오해한다. 모든 책임을 내려놓고, 세속의 문제에서 벗어나 조용한 세계로 숨어드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부처님이 설하신 해탈은 회피가 아니라 직면 끝에 얻는 자유다. 깨닫지 못한 벗어남은 도피에 불과하지만, 깨달은 벗어남은 삶을 꿰뚫는 힘이 된다. 각오覺悟는 먼저 ‘알아차림’에서 시작된다. 내가 왜 화가 나는지, 무엇에 집착하고 있는지, 어떤 두려움이 나를 붙잡고 있는지를 정직하게 보는 일이다. 문제는 대부분 고통 그 자체가 아니라, 고통을 부정하거나 미화하며 자신을 속이는 데서 생긴다. 각오는 마음을 미화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를 본다. 그 순간부터 수행은 이미 시작된다. 번뇌는 외부에 있지 않다. 상황이 우리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상황을 대하는 마음이 우리를 묶는다. 비교하는 마음, 인정받고자 하는 갈증, 잃을까 두려워 움켜쥐는 집착이 번뇌의 뿌리다. 그래서 부처님은 세상을 없애라고
법왕청신문 김학영 기자 |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중생이 곧 부처요, 부처가 곧 중생이라.” 오늘의 청년들을 향해 사회는 쉽게 말한다. “요즘 젊은 것들은 의욕이 없다.” “취업도 안 하려 하고, 도전도 안 한다.” “무기력 세대다.” 그러나 법의 눈으로 보면, 이 판단은 너무 얕다. 지금의 청년들은 게으른 것이 아니라 지친 것이다. 노력하면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이 깨진 사회에서, 그들은 수없이 문을 두드렸고 수없이 거절당했다. 이력서를 백 번 써도 답이 없고, 면접을 통과해도 비정규직이라는 이름표가 붙는다. 꿈을 말하면 “현실을 모르네”라는 말이 돌아오고, 현실을 말하면 “도전정신이 없다”는 비난이 쏟아진다. 이 모순 속에서 마음이 먼저 멈춘다. 이것이 오늘 청년들의 무기력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고苦는 단순한 불행이 아니다. 고는 “삶이 뜻대로 되지 않음을 정확히 아는 상태”다. 지금의 청년들은 바로 이 고를 너무 이르게, 너무 선명하게 알아버린 세대다. 그래서 그들은 묻는다. “왜 살아야 하는가.” “노력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구조 안에서 나는 어떤 존재인가.” 이 질문은 타락의 증거가 아니다. 오히려 각성의 징후다. 부처님 또한 왕궁의 안락함
법왕청신문 김학영 기자 | 재단법인법왕청평화재단 이사장 담화총사께서는 불기2570년(2026)병오년丙午年을 맞이하여 신년 법어를 내리셨다. 새해를 맞이하여 우리는 급변하는 세계 질서와 인류 공동체의 현실 앞에서 불교도의 사명과 책임을 엄숙히 선언한다. 오늘의 세계는 과학과 기술의 발전으로 물리적 거리는 가까워졌으나, 갈등과 분열, 차별과 혐오는 오히려 심화되고 있다. 전쟁과 폭력, 빈곤과 기후 위기, 종교·이념·민족 간의 대립은 인류 전체의 존립을 위협하고 있다. 불교는 이와 같은 시대적 상황 앞에서 침묵하거나 방관할 수 없다. 불교의 근본 가르침은 모든 존재가 상호 의존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홀로 존재하는 생명은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 가르침은 곧 우주는 하나이며, 세계는 한 가족이라는 선언으로 귀결된다. 우주가 하나라는 인식은 모든 생명이 동일한 근원과 가치를 지닌 존재임을 뜻하며, 세계가 한 가족이라는 선언은 어느 한 곳의 고통이 곧 인류 전체의 고통임을 의미한다. 국경과 종교, 이념과 문화의 차이는 차별과 배제의 근거가 될 수 없으며, 인류 공동체는 연대와 책임 위에서만 지속될 수 있다. 이에 우리는 다음의 신년 법어를 공식적으로 천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공익법인 담화문화재단 이사장 담화총사는 성탄절을 맞이하여 우리는 종교와 신앙의 경계를 넘어 인류 공동의 가치인 평화와 사랑, 생명의 존엄을 다시 한 번 되새긴다. 성탄은 특정 종교의 기념일을 넘어 어둠 속에서 빛이 태어났음을 알리는 날이며, 분열과 갈등의 시대에 화해와 연대의 가능성을 일깨우는 상징적 시간이다. 불교는 오래전부터 모든 존재가 서로 의지하여 일어나며 홀로 존재하는 생명은 없다고 가르쳐 왔다. 이 가르침은 오늘의 세계가 직면한 위기 앞에서 더욱 절실한 의미를 지닌다. 우주는 하나이며, 세계는 한 가족이다. 이는 신앙의 차이를 넘어 모든 인류가 공유해야 할 보편적 진실이다. 한 사람의 고통은 곧 인류 전체의 고통이며, 한 곳의 평화는 모두의 희망이 된다. 성탄이 전하는 사랑은 말에 머무는 감정이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되는 책임이다. 불교가 말하는 자비 또한 침묵이 아니라 참여이며, 관조가 아니라 연대이다. 종교는 갈등의 이유가 아니라 평화를 이루는 통로가 되어야 한다. 각자의 신앙은 다를지라도 생명을 존중하고 폭력을 거부하며 이웃의 아픔에 응답해야 한다는 점에서 모든 종교는 하나의 길로 만난다. 성탄절에 우리는 다시 한 번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천년의뜰은 더 이상 ‘공간’이 아니라 하나의 상징이 되었다. 원과 곡선, 한 점의 빛으로 그려진 로고 속에, 삶과 죽음, 인연과 향기가 서로를 비추는 천년향화지지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세상에는 수많은 상징이 있지만, 어떤 상징은 단순한 도안을 넘어 마음의 길, 인연의 시간, 그리고 한 공간의 철학을 담는다. 천년의뜰 로고가 바로 그런 상징이다. 로고를 바라보고 있으면 처음엔 단정한 하나의 원처럼 보인다. 그러나 오래 바라보면 그 안에 흐르는 곡선, 빛, 여백이 마음을 조용히 흔들어 놓는다. 이 원은 완성圓이 아니라 순환의 원, 끝이 아니라 다시 시작되는 길을 뜻한다. 삶과 죽음이 끊어지지 않고 연결되며 인연과 사랑이 천 년을 이어 흐르는 불교적 깊이를 담고 있다. 원 안의 곡선들은 바람처럼 부드럽고, 꽃잎처럼 자연스럽고, 시간처럼 잔잔하게 흐른다. 이는 천년향화지지千年香花之地의 향기가 바람을 타고 흩어지듯, 그리움이 향기로 바뀌는 과정을 상징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로고의 중심에 놓인 작은 한 점의 빛이다. 이 점은 강한 불빛이 아니다. 은은하고 따스하게 번지는 미광微光, 바로 부처님 자비의 빛이다. 영가에게는 길을 비추는
법왕청신문 장규호 기자 | 천년향화지지千年香華之地 벽사초불정사僻邪招佛精舍에서 시작하는 영구위패·환구단·기제사·정기 천도재의 통합 봉안 “예를 알면 천하가 다스려지고, 예를 잃으면 천하가 어지럽다.” 제사는 의식이 아니라, 죽은 자의 ‘존재 확인’이자 산 자의 ‘정체성 재구성’입니다. 새벽 종소리와 한 줄기 향이 닿는 곳, 그 약속의 자리를 오늘, 벽사초불정사가 책임집니다. 벽사초불정사僻邪招佛精舍에 들어서거든 “벽사僻邪”라 말하고, “초불招佛”이라 부르라. “사악함을 물리치고 벽사僻邪, 부처님을 모셔 복된 인연을 불러들이는 초불招佛 정결한 도량精舍” 이라는 뜻입니다. 즉.악을 멀리하고 복과 깨달음을 불러들이는 사찰, 모든 중생의 번뇌를 막고 자비를 모시는 도량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1) 왜 ‘사찰 봉안’인가: 핵가족 시대의 마지막 효도, 영구 위탁 관리 핵가족·도시화로 가정 사당이 사라진 시대, 위패는 집이 아닌 전문 도량에 모시는 것이 가장 안정적입니다. 사찰은 항온·항습·방재 체계를 갖춘 위패당과 의식을 집전하는 전문 승가 시스템을 통해, 1세대가 아닌 영구 관리를 가능하게 합니다. 위패는 추모의 기호가 아니라 영혼의 자리(位)입니다. 위패가 있어야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천재일우千載一遇란 “천 년에 한 번 만날 수 있는 소중한 인연”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아주 드물고 귀한 기회를 가리킵니다. 불교에서는 이를 인연因緣과 희유希有의 가르침으로 풀어낼 수 있습니다. 『법화경』에 “희유난득希有難得”이라 하여, 좋은 인연을 만나는 것은 드물고 얻기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부처님 당시, 한 청년이 멀리서 법문 소식을 듣고는 삼천리를 걸어 부처님께 나아갔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말했습니다. “굳이 그렇게 먼 길을 갈 필요가 있느냐? 마을에도 수행자가 많지 않느냐?” 청년은 대답했습니다. “부처님 법문을 직접 듣는 것은 천재일우의 인연이다.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얻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 청년은 부처님 앞에서 귀의하며 법을 배우고, 평생 법의 향기를 전하는 수행자가 되었습니다. 사람으로 태어난 것 자체가 천재일우의 인연입니다. 불법佛法을 만난 것도, 그 법을 귀로 들을 수 있는 것도 천재일우의 인연입니다. 스승을 만나고, 도반을 얻고, 불법을 실천할 수 있는 순간은 다시 오기 어려운 귀중한 기회입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지금 이 순간의 인연을 놓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수 있고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한 치의 걸음도 옮긴 적이 없다.” 이는 본래 부처님의 자리는 움직임이 없다는 뜻입니다. 不曾移寸步불증이촌보 우리 마음의 본성, 즉 불성佛性은 본래 고요하고 청정하여 흔들림이 없습니다. 세상이 변해도, 우리의 감정이 출렁거려도, 본래의 자리는 늘 그 자리에 머물러 있습니다.우리가 수행으로 찾아야 하는 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본래 있던 그 자리임을 일깨우는 말씀입니다. 處處現真身처처현진신 “가는 곳마다 참된 부처님의 몸이 드러난다.” 비록 본래 마음은 움직이지 않지만, 그 자비와 지혜는 시·공간을 가리지 않고 드러납니다. 어린아이의 맑은 눈빛에도,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에도, 환한 웃음에도, 눈물 속에도 부처님의 몸은 드러납니다. 진리의 빛은 특정한 장소에 머물지 않고, 곳곳에서 우리에게 응현應現합니다. 우리 삶의 의미 이 두 구절을 합치면, “본래 마음은 변치 않되, 모든 곳에서 부처님이 드러난다.”**는 가르침이 됩니다. 수행이란 억지로 무언가를 쌓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본래의 자리를 깨닫는 일입니다. 또한 그 깨달음은 혼자만의 고요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자비와 실천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향은 천년을 잇고, 기도는 영원을 품다” 천년향화지지, 최고의 영적 성소” 벽사초불정사僻邪招佛精舍에 이르거든 마땅히 ‘벽사僻邪’라 말하고, ‘초불招佛’이라 칭할지니라. Ⅰ. 머리말 발원문 - 향기와 기도가 머무는 자리 벽사초불정사僻邪招佛精舍에 이르거든 마땅히 ‘벽사僻邪’라 말하고, ‘초불招佛’이라 칭할지니라. 이 한 마디 속에 이미 사찰의 뜻이 담겨 있다. 삿됨은 이 문을 넘지 못하고, 복은 이 도량에 머무른다. 향은 천 년을 이어 타오르고, 기도는 만 세대를 넘어 전해진다. 청주의 산자락에 자리한 벽사초불정사 천년의 뜰은 단순한 추모의 공간이 아니다. 이곳은 삶과 죽음, 전통과 오늘, 산 자와 죽은 자가 함께 위로받는 천년향화지지千年香火之地다. 스님들의 염불 소리가 끊이지 않고, 향화의 연기가 맑은 하늘에 닿는 이 도량에서 우리는 삶의 무게를 내려놓고 영원의 안식을 기원하며, 전통과 미래가 공존하는 문화적 숨결을 느낀다. 천년의 향화가 꺼지지 않는 이곳에서 모든 인연은 한 송이 연꽃처럼 피어나, 누구나 평안과 위안을 얻을 수 있기를 발원한다. 曇華總師 合掌 Ⅱ. 향기와 기도가 머무는 도량 1. 천년향화지지란 무엇인가? 옛사람들은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백 가지 지혜가 단 하나의 무심無心만 못하다는 말은 생각이 깊을수록 본질에서 멀어질 수 있음을 일깨운다. 안팎의 마음을 버리고, 지금까지 쌓아온 공덕조차 버려야만 비로소 부처의 길이 열린다는 말씀, 이는 곧 ‘놓는 것이 얻는 것이다’라는 도리다. 삼계三界는 불타는 집이다. 그 속에서 진정한 법왕은 누구인가? 석가도 미륵도 아닌, 당신의 눈동자 안에 비친 그 자성이 법왕이다. 그러니 외호外護의 이름에 메이지 말고 내면의 광명을 바라보아야 한다. 내가 설한 일체의 법은 모두가 ‘조병무早騈拇’라 하셨다. 즉, 필요 이상으로 덧붙인 말일 뿐, 진실을 가리는 안개일 수 있음을 경계하신 것이다. 오늘 일을 묻는가? 달은 강마다 고요히 비친다. 강이 맑으면 달빛은 더욱 또렷하고, 마음이 고요하면 진리는 스스로 드러난다. 효봉스님은 입적하는 그날에도 “화두가 들리십니까?”라는 물음에 세 번 ‘무無’라 하시며 삶과 죽음, 얻음과 놓음을 한 줄기 화두로 삼아 떠나셨다. 우리도 묻지 말고, 지혜를 꾸미지 말며, 그저 달빛을 받아들일 마음 그릇 하나를 비워둘 일이다.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水聲松影裏 禪意自淸閑 수성송영리 선의자청한 물소리가 흐르고 소나무 그림자 드리운 자리, 그곳에서 참선의 뜻은 저절로 맑고 고요하구나. 여름 바람이 뜨거워지는 아침, 차가운 물소리와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로 잠잠히 앉아보세요. 더위를 피하려 하지 말고, 더위 속에 숨은 맑은 자리를 찾는 연습을 해봅시다. 덧없음을 아는 자는 서두르지 않는다. 덧없는 꽃은 피었다가 이내 지지만,그 향기는 사람의 마음속에 오래 남습니다. 우리 인생도 그러합니다. 젊음은 지나가고, 소유는 흩어지고, 감정은 흔들리며, 몸도 마음도 언젠가 멈춥니다. 그 덧없음을 알면 집착이 줄고, 탐욕이 식고, 마음이 맑아집니다. 그 순간 우리는 참된 ‘보시’와 ‘감사’, 그리고 ‘수행’의 길에 들어설 수 있습니다. 선禪은 더위를 식히는 바람이다 “더위를 없애려 하지 말고, 더위 속에서도 시원한 마음 하나 품어보라.” 이 말은 선창에서 전해 내려오는 가르침입니다. 무더위에 짜증이 올라올 때, 몸은 땀에 젖었지만 마음만은 고요한 물 위에 앉아 있는 것처럼 그것이 선禪의 힘입니다. 여름 한가운데서 마음을 식히는 법 1. 숨 고르기 등을 곧게 하고 편안히 앉으세요. 들이쉬는 숨을 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