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옛 중국의 한 노인이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 마을 사람들과 길을 나섰다. 그런데 길은 하나가 아니었다. 좁은 골목 끝에 또 다른 갈림길이 있었고, 그 길 끝에는 다시 수많은 길이 이어졌다. 사람들은 결국 양을 찾지 못하고 돌아왔다. 누군가 물었다. “양 한 마리를 찾는데 왜 이렇게 많은 사람이 필요했습니까?” 노인은 깊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길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오.” 이 이야기가 바로 "망양지탄亡羊之歎"의 시작이다. 불교에서 길은 곧 마음이다. 사람은 살아가며 수많은 선택 앞에 선다. 돈을 좇을 것인가, 명예를 따를 것인가, 욕망을 채울 것인가, 마음을 지킬 것인가. 문제는 길이 많다는 데 있지 않다. 문제는 자기 마음을 잃어버리는 데 있다. 요즘 사람들은 너무 많은 정보 속에 살아간다. 누구의 말이 옳은지, 무엇이 진실인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몰라 마음이 흔들린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분별심의 번뇌”라 한다. 생각이 많아질수록 마음은 복잡해지고, 욕심이 커질수록 본래의 자신을 잃어버리게 된다. 마치 양을 찾으러 갔다가 길 속에서 길을 잃는 것과 같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마음을 잃으면 온 세상을 얻어도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세상 사람들은 늘 무엇인가를 찾는다. 돈을 찾고, 명예를 찾고, 사람을 찾고, 행복을 찾는다. 그러나 정작 자신을 찾는 사람은 많지 않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밖으로만 구하면 끝내 얻지 못하고, 안으로 돌아보면 이미 갖추어져 있느니라.” 오늘날 사람들은 손에 휴대폰을 들고 온 세상 정보를 찾는다 하지만 정작 자신의 마음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알지 못한 채 살아간다. 마치 소 등에 올라타고 소를 찾는 사람과 같다. 도道는 먼 곳에 있지 않다. 산속 깊은 암자에만 있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사람만 얻는 것도 아니다. 매일 걷는 길 위에 있고, 매일 만나는 사람 속에 있으며,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 있다. 문제는 길이 없는 것이 아니라 길을 보지 못하는 마음이다. 사람들은 남보다 앞서기 위해 달린다. 더 많은 재산, 더 높은 자리, 더 큰 성공을 얻으려 애쓴다. 그러나 욕망은 채울수록 더 커지고, 집착은 붙잡을수록 더 무거워진다. 그래서 마음은 점점 지치고, 삶은 점점 불안해진다. 운수납자여. 그대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소유가 아니다. 청산 같은 넉넉함과 명월 같은 밝은 마음이다. 흐르는 시냇물은 돌을 만나도 다투지 않는다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이 비석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묻습니다. “왜 하필 돌이었을까?” 붓으로 쓰면 더 빠르고, 종이에 남기면 더 쉽고, 책으로 만들면 더 많이 읽힐 텐데 왜 큰스님은 굳이 돌에 새기셨을까. 그것도 한 기가 아니라 무려 788기의 남북평화통일 시비詩碑를 세우셨을까. 그 이유는 단순하지 않습니다. 돌은 오래 남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돌은 거짓말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종이는 찢어질 수 있고, 말은 바람 따라 흩어지며, 권력은 시대 따라 바뀌고, 사람의 기억은 쉽게 흐려집니다. 그러나 돌은 다릅니다. 한번 새겨진 뜻은 비바람 속에서도 남아 있고, 사람이 떠난 뒤에도 침묵 속에서 말을 이어갑니다. 일붕 큰스님은 그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붓으로 먼저 마음을 쓰고 그 붓글씨를 다시 돌에 새기셨습니다. 왜입니까? 평화는 순간의 구호가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평화는 행사장의 현수막이 아니라 후손에게 남겨야 할 약속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남북통일을 말하는 사람은 많았습니다. 그러나 말은 많아도 끝까지 남는 서원은 드물었습니다. 일붕 스님은 통일을 정치의 언어로 보지 않으셨습니다. 통일은 민족의 아픔을 치유하는 자비의 서원이었습니다. 북과 남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한 장의 사진은 때로 한 권의 역사책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사진은 초대 법왕 일붕 서경보一鵬 徐京保 큰스님과, 당시 비서실장으로 곁을 지키며 수행하던 담화의 젊은 시절 모습을 담고 있다. 장소는 김포국제공항. 세계를 향한 포교 원력을 품고 떠나는 길목에서 남겨진 소중한 기록이다. 당시 담화는 단순한 수행 보좌자가 아니었다. 큰스님의 곁에서 발걸음을 맞추고, 말씀을 가까이에서 듣고, 세계불교를 향한 원대한 비전을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배우며 실천했던 수행 동반자였다. 큰스님이 걸었던 길은 곧 법의 길이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포교였고, 만남 하나하나가 불교 외교였으며, 침묵 속에서도 법문이 흘렀다. 젊은 담화가 늘 큰스님의 곁을 지켰던 이유는 단순한 수행 보필이 아니라, 스승의 삶 자체가 곧 살아 있는 경전이었기 때문이다. 사진 속 일붕 큰스님의 온화한 표정과 담화의 굳건한 모습은 단순한 동행이 아니다. 그것은 법맥의 전승, 원력의 계승, 그리고 한 시대의 정신을 이어가는 약속이다. 김포국제공항이라는 분주한 공간 속에서도, 이 사진은 묘한 고요함을 품고 있다. 세상을 향해 나아가되 세속에 흔들리지 않았던 수행자의 기품,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한 점의 도자는 단순한 기물이 아니다. 그 안에 한 시대의 정신이 깃들고, 한 인물의 숨결이 머물면 그것은 곧 역사가 된다. 사진 속 백자 도자에는 ‘일붕기념관一鵬紀念館’이라는 글귀와 함께, 초대 법왕 일붕 서경보一鵬 徐京甫保 큰스님의 친필 묵적이 담겨 있다. 이는 단순한 서예 작품이 아니라, 세계불교를 향해 비상했던 한 수행자의 정신과 원력이 도자 위에 새겨진 귀중한 문화 유산이다. 일붕 큰스님은 한국 불교 현대사의 거목이자, 세계불교를 향한 원대한 비전을 펼친 선지식이었다. 삼장법사로서의 학덕과 수행, 세계를 향한 포교 원력, 그리고 불교 평화외교의 선구적 행보는 오늘날에도 깊은 울림을 준다. 이 도자에 담긴 친필은 단순한 글씨가 아니다. 붓끝마다 수행자의 기백이 살아 있고, 획마다 법문의 울림이 스며 있다. 강건하면서도 유려한 필치는 큰스님의 정신세계를 그대로 보여주는 또 하나의 법문이라 할 만하다. 특히 ‘일붕기념관’이라는 표기는, 큰스님의 사상과 업적이 단지 한 시대의 기억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후대에 길이 계승되어야 할 정신적 유산임을 상징한다. 현재 이 귀한 도자는 담화총사 소장으로, 초대 법왕 일붕 서경보 큰스님의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1992년, 세계불교사에 있어 하나의 중대한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 있었다. 바로 ‘세계불교평화의 날’ 제정 공포이다. 이는 단순한 기념일의 선포를 넘어, 분열과 갈등 속에 놓인 인류를 향한 불교적 평화 정신의 공식적인 선언이자, 종교를 초월한 인류 공동의 가치로서 ‘평화’를 제시한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된다. 특히 이 선언은 더욱 깊은 의미를 지닌다. 부처님 오신 날을 ‘세계불교평화의 날’로 제정·공포함으로써, 탄생의 기쁨을 넘어 인류 전체의 평화와 화합을 기원하는 보편적 메시지로 승화시켰기 때문이다. 이는 불교가 특정 종교의 경계를 넘어, 세계 인류를 위한 평화의 길을 제시하는 실천적 종교임을 분명히 한 상징적 결정이었다. 이와 같은 시대적 선언은 세계불교 초대법왕 일붕 서경보 스님의 깊은 사상과 실천적 원력에서 비롯되었다. 스님은 불교가 단순한 신앙 체계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고통을 덜고 세계 평화를 실현하는 적극적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확고한 철학을 바탕으로 이 뜻깊은 날을 제정하였다. 특히 이번에 조명되는 친필 휘호는 그러한 선언의 정신을 집약적으로 담아낸 상징적 작품이다. 힘차면서도 유려한 필체로 완성된 이 작품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세상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지만, 인간의 고통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반복되고 있다. 배고픔, 질병, 고립, 억압, 가난, 그리고 차별, 이 모든 것은 시대가 바뀌어도 사라지지 않는 인류의 숙명과도 같은 문제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고통을 단순히 바라보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우리는 행동해야 하고, 동시에 기도해야 한다. 기도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가장 강력한 힘이다. 옛 성현들은 기도를 통해 산을 움직일 수 있다고 하였고, 자연의 법칙마저 멈출 수 있다고 하였다. 이 말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인간의 마음과 의지가 얼마나 큰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일깨우는 깊은 가르침이다. 우리는 흔히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한다. 그러나 진정한 기도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굶주린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보다, 그들을 굶주리게 만든 이들을 위해 더 깊이 기도해야 한다. 병든 이를 위해 기도하는 것보다, 그들을 돌보지 않는 이들을 위해 더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외로운 이를 위해 기도하는 것보다, 그들을 외면한 이들을 위해 더 크게 기도해야 한다. 왜냐 하면 고통의 근원은 단순한 상황이 아니라, 인간의 무관심과 이기심에서 비롯되기
법왕청신문 이준석 기자 | “천년향화지지” 청주 쌍이리 벽사초불정사辟邪招佛精舍에서 지장보살님의 자비 속에 신비로운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법화法花, 또는 우담바라꽃優曇婆羅花, 이 도량 곳곳에 맺히며 길상의 기운인 서기瑞氣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 동영상 = 우담바라는 경전에 전해지기를 “3천 년에 한 번 피는 상서로운 꽃” 이라 하며, 부처님의 가르침이 머무는 곳에서만 드러나는 길상의 상징으로 전해집니다. 지장보살의 자비가 머무는 이곳에서 법이 꽃으로 피어나고 마음이 빛으로 드러나는 특별한 인연의 시간이 열리고 있습니다. 지금, 이 귀한 인연을 직접 친견하시어 삿됨을 끊고 복을 불러들이는 벽사초불정사의 가피를 받아가시기 바랍니다. 안내 천년향화지지, 청주 벽사초불정사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단재로 2776 (경찰항공대 인근) 문의: 043-296-1081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1914년 10월 10일, 제주도 서귀포시 도순동,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이고 산방산의 기운이 서린 그 땅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이천 서씨 가문에서 태어난 그 아이는 훗날 ‘한 마리 큰 새’, 곧 세계를 날아오를 수행자가 된다. 법호 일붕一鵬 한 마리 붕새라는 이름은, 마치 그의 삶 전체를 미리 예언한 듯했다. 어린 시절 한학을 익히고, 집안의 뜻에 따라 16세에 혼인도 했지만 그의 마음은 일찍부터 세속에 머물지 않았다. 삶의 근원에 대한 질문, 존재의 본질에 대한 물음이 늘 그를 다른 길로 이끌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결단의 시간이 찾아왔다. 산방굴사의 새벽, 출가 1932년, 열아홉의 서경보는 제주 산방산 기슭 산방굴사山房窟寺 광명암에서 강월姜慧月 화상을 은사로 출가했다. 세속의 이름을 내려놓고 받은 법명은 회암悔巖산방산의 바람과 바위, 그 고요한 굴사에서 한 청년은 수행자의 길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러나 그의 구도는 제주에 머물지 않았다. 1933년 화엄사에서 진진응 강백을 찾아 수학했고, 1935년에는 완주 위봉사 강원에서 사미과·사집과를 졸업했다. 이때 위봉사 주지 춘담 스님은 그를 법제자로 삼으며 새로운 법호를 내려준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요즘 청년 불자들은 종종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나는 불자인가, 그냥 절에 가는 사람인가.” 바쁘고, 흔들리고, 마음은 늘 알림 소리에 쫓깁니다. 수행은 멀게 느껴지고, 죽음과 봉안 이야기는 더더욱 내 얘기가 아닌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불교는 언제나 묻습니다. “지금, 네 마음은 어디에 머물러 있느냐.” 불경에 나오는 연화동자는 깨달음을 외치지 않았습니다. 대단한 수행을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흔들리지 않는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줄 알았을 뿐입니다. 연꽃 위에 앉은 아이처럼 진흙 속에서도 마음을 잃지 않는 것, 그게 수행이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이 땅에 일붕 초대법왕이 계셨습니다. 법왕께서는 산속에만 머무르지 않으셨습니다. 세상 한가운데로 들어와 더 고요해지는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세상이 시끄러울수록 마음은 더 조용해야 한다.” 이 말은 오늘을 사는 청년 불자에게 유난히 깊게 다가옵니다. 그리고 지금, 그 가르침을 이어 담화총사는 하나의 질문을 던집니다. “신행은 어디까지 이어질 수 있는가.” 그 답이 벽사초불정사 ‘천년의 뜰’입니다. 천년의 뜰은 ‘죽음을 준비하는 공간’이 아닙니다. 오히려 삶의 태도를 묻는 자리입니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불교에서 신행이란 절에 다니는 횟수가 아니라 삶의 태도를 부처님 법에 맡기는 일이다. 그래서 불자는 삶의 끝에서도 신행을 멈추지 않는다. 옛 경전에 연화동자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연꽃 위에 앉아 태어난 아이,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도 마음을 먼저 고요히 두었던 존재. 연화동자는 깨달음을 말하지 않았다. 다만 흔들리지 않는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았을 뿐이다. 그 고요한 관조가 곧 수행이었고, 그 삶 자체가 법문이었다. 세월이 흘러 이 땅에 일붕 초대법왕이 계셨다. 법왕께서는 권위로 가르치지 않으셨고, 말로만 법을 전하지 않으셨다. 혼란의 시대 속에서도 분별보다 관조를, 분노보다 자비를 택하셨다. 법왕께서 평생 강조하신 것은 화려한 수행이 아니라 정관靜觀, 곧 고요히 보고 깊이 관하는 수행이었다. “마음이 고요하면 생사 또한 두려울 것이 없다.” 이 말은 삶뿐 아니라 죽음 이후까지 꿰뚫는 가르침이었다. 그리고 그 법맥을 이어 오늘을 살아가는 수행자가 있다. 제자 담화총사다. 담화총사는 스승의 가르침을 말이 아닌 공간과 실천으로 이어가고자 했다. 그 결실이 바로 벽사초불정사 ‘천년의 뜰’이다. 천년의 뜰은 봉안을 위한 시설이 아니다. 이곳
법왕청신문 김학영 기자 | 어머니의 숨결이 멎던 날, 나는 비로소 알았다. 사람의 생은 끝나도, 마음은 쉽게 떠나지 않는다는 것을, 사진 속 미소는 시간이 지나 빛이 바래지만, 그 미소를 떠올리는 마음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살아 있다. 그래서 우리는 문득 아무 이유 없이 부모의 이름을 부른다. 요즘 젊은 세대에게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말은 부담으로 들릴지도 모른다. 바쁜 삶, 좁아진 공간, 흩어진 가족 속에서 조상을 모신다는 일은 점점 멀어진 풍경이 되었다. 그러나 제사의 본래 뜻은 형식이 아니라 마음을 다시 모시는 일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제사를 지낼 때 반드시 위패를 모셔 예를 올린 뒤, 다시 본래의 자리로 모시는 것을 중히 여긴다. 이를 반혼재返魂齋라 한다. 혼을 불러와 예를 다하고, 다시 평안히 돌아가시도록 보내는 의식이다. 위패는 나무 조각이 아니다. 그것은 부모의 이름이 쉬는 자리, 자식의 마음이 돌아오는 좌표다. 제사를 마친 뒤 위패를 아무렇게나 두지 않고 다시 봉안하는 이유는, 부모의 혼이 늘 평안히 머물도록 자식의 마음을 바로 세우기 위함이다. 그래서 우리는 봉안당을 찾는다. 눈물 대신 향을 피우고, 후회 대신 기도를 올리며,부처님
법왕청신문 김학영 기자 | 불교에서 말하는 覺悟解脫각오해탈은 수행의 완성이자 삶의 태도를 가르는 기준이다. ‘깨닫고 번뇌에서 벗어난다.’ 이 말은 고통이 사라진 세상을 약속하지 않는다. 고통에 끌려다니지 않는 자유를 가리킨다. 사람들은 흔히 해탈을 현실을 떠나는 일로 오해한다. 모든 책임을 내려놓고, 세속의 문제에서 벗어나 조용한 세계로 숨어드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부처님이 설하신 해탈은 회피가 아니라 직면 끝에 얻는 자유다. 깨닫지 못한 벗어남은 도피에 불과하지만, 깨달은 벗어남은 삶을 꿰뚫는 힘이 된다. 각오覺悟는 먼저 ‘알아차림’에서 시작된다. 내가 왜 화가 나는지, 무엇에 집착하고 있는지, 어떤 두려움이 나를 붙잡고 있는지를 정직하게 보는 일이다. 문제는 대부분 고통 그 자체가 아니라, 고통을 부정하거나 미화하며 자신을 속이는 데서 생긴다. 각오는 마음을 미화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를 본다. 그 순간부터 수행은 이미 시작된다. 번뇌는 외부에 있지 않다. 상황이 우리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상황을 대하는 마음이 우리를 묶는다. 비교하는 마음, 인정받고자 하는 갈증, 잃을까 두려워 움켜쥐는 집착이 번뇌의 뿌리다. 그래서 부처님은 세상을 없애라고
법왕청신문 김학영 기자 |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중생이 곧 부처요, 부처가 곧 중생이라.” 오늘의 청년들을 향해 사회는 쉽게 말한다. “요즘 젊은 것들은 의욕이 없다.” “취업도 안 하려 하고, 도전도 안 한다.” “무기력 세대다.” 그러나 법의 눈으로 보면, 이 판단은 너무 얕다. 지금의 청년들은 게으른 것이 아니라 지친 것이다. 노력하면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이 깨진 사회에서, 그들은 수없이 문을 두드렸고 수없이 거절당했다. 이력서를 백 번 써도 답이 없고, 면접을 통과해도 비정규직이라는 이름표가 붙는다. 꿈을 말하면 “현실을 모르네”라는 말이 돌아오고, 현실을 말하면 “도전정신이 없다”는 비난이 쏟아진다. 이 모순 속에서 마음이 먼저 멈춘다. 이것이 오늘 청년들의 무기력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고苦는 단순한 불행이 아니다. 고는 “삶이 뜻대로 되지 않음을 정확히 아는 상태”다. 지금의 청년들은 바로 이 고를 너무 이르게, 너무 선명하게 알아버린 세대다. 그래서 그들은 묻는다. “왜 살아야 하는가.” “노력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구조 안에서 나는 어떤 존재인가.” 이 질문은 타락의 증거가 아니다. 오히려 각성의 징후다. 부처님 또한 왕궁의 안락함
법왕청신문 김학영 기자 | 재단법인법왕청평화재단 이사장 담화총사께서는 불기2570년(2026)병오년丙午年을 맞이하여 신년 법어를 내리셨다. 새해를 맞이하여 우리는 급변하는 세계 질서와 인류 공동체의 현실 앞에서 불교도의 사명과 책임을 엄숙히 선언한다. 오늘의 세계는 과학과 기술의 발전으로 물리적 거리는 가까워졌으나, 갈등과 분열, 차별과 혐오는 오히려 심화되고 있다. 전쟁과 폭력, 빈곤과 기후 위기, 종교·이념·민족 간의 대립은 인류 전체의 존립을 위협하고 있다. 불교는 이와 같은 시대적 상황 앞에서 침묵하거나 방관할 수 없다. 불교의 근본 가르침은 모든 존재가 상호 의존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홀로 존재하는 생명은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 가르침은 곧 우주는 하나이며, 세계는 한 가족이라는 선언으로 귀결된다. 우주가 하나라는 인식은 모든 생명이 동일한 근원과 가치를 지닌 존재임을 뜻하며, 세계가 한 가족이라는 선언은 어느 한 곳의 고통이 곧 인류 전체의 고통임을 의미한다. 국경과 종교, 이념과 문화의 차이는 차별과 배제의 근거가 될 수 없으며, 인류 공동체는 연대와 책임 위에서만 지속될 수 있다. 이에 우리는 다음의 신년 법어를 공식적으로 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