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어둠은 언제나 밖에서 오는 것처럼 보입니다. 세상이 어렵다 하고, 사람이 변했다 하고, 형편이 나쁘다 하며 우리는 쉽게 말합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십시오. 어둠은 본래 실체가 없습니다. 빛이 없을 뿐입니다. 어둠은 밀어낼 대상이 아니라 밝힐 대상입니다. 등불은 어둠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왜 이렇게 캄캄하냐”고 묻지 않습니다. 그저 자기 심지에 불을 붙일 뿐입니다. 작은 불꽃 하나가 넓은 방을 밝히고, 한 사람의 마음을 살리고, 한 시대의 방향을 바꿉니다. 등불은 크지 않아도 됩니다. 꺼지지 않으면 됩니다. 지혜로운 이는 환경을 탓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압니다. 환경은 조건일 뿐, 결정은 자기 마음이 한다는 것을. 비가 오면 우산을 쓰고, 눈이 오면 발걸음을 조심하며, 바람이 불면 몸을 낮추면 됩니다. 하늘을 원망한다고 날씨가 바뀌지 않습니다. 수행이란 무엇입니까? 바깥을 바꾸는 일이 아니라 안의 불을 지키는 일입니다. 누가 나를 헐뜯어도 마음의 등불을 꺼뜨리지 않는 것, 세상이 거칠어도 자비의 불씨를 놓지 않는 것, 형편이 궁해도 원력을 줄이지 않는 것. 그것이 수행입니다. 어둠이 깊을수록 등불은 더 또렷해집니다. 고난이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무위도식無爲徒食이란 말은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먹고 사는 것을 뜻한다. 이 말은 단순히 게으름을 꾸짖는 말이 아니다. 불교에서는 이 말 속에 삶에 대한 태도를 묻는 깊은 뜻이 담겨 있다. 부처님은 수행자들에게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몸은 공양을 받는 몸이니, 그 공양만큼 세상에 보답하라.” 공양을 받는다는 것은 책임을 진다는 뜻이다. 불교에서 밥 한 끼는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다. 한 숟가락 밥에는 농부의 땀과 자연의 은혜, 그리고 공동체의 신뢰가 담겨 있다. 그래서 출가자는 말한다. “이 밥값을 무엇으로 갚을 것인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먹는 삶, 즉 무위도식이란 몸은 살아 있으나 마음은 이미 수행을 떠난 상태를 말한다. 불교에는 ‘무위無爲’라는 말이 있다. 이는 억지로 꾸미지 않는 자연스러운 삶을 뜻한다. 그러나 무위와 무위도식은 전혀 다르다. 무위는 집착을 내려놓은 행위이고, 무위도식은 책임을 내려놓은 태도다. 부처님은 하루도 빈손으로 살지 않으셨다. 말 한 마디, 발걸음 하나, 침묵조차도 중생을 이롭게 하는 법문이 되게 하셨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헛되이 살지 않으셨다. 일하지 않는 손보다, 마음을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세상은 늘 편을 가르려 합니다. 내 편과 네 편, 옳고 그름 이전에 서로의 자리를 먼저 나눕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길은 언제나 그 한가운데에 서 있었습니다. 치우치지 않고, 무리에 휩쓸리지 않는 자리. 그 자리를 가리켜 우리는 무편무당無偏無黨이라 부릅니다. 무편무당이란, 아무 생각도, 아무 입장도 가지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깨어 있는 태도입니다. 치우침은 마음이 먼저 결론을 내릴 때 생기고, 무리는 생각을 대신해 판단해 줄 때 만들어집니다. 그 순간, 우리는 편해지지만 진실에서는 멀어집니다. 부처님께서는 “중도는 양쪽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양쪽을 다 살피는 지혜”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무편무당은 옳고 그름을 가리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사람이 아니라 사안을 보고, 감정이 아니라 인연을 살피라는 가르침입니다. 오늘의 사회를 비추는 무편무당 오늘 우리는 의견보다 진영을 먼저 묻고, 사실보다 소속을 먼저 확인합니다. 그러나 불교의 눈으로 보면 그 순간부터 갈등은 시작됩니다. 무편무당의 사람은 누구의 말인지보다 무슨 말인지를 듣고, 어느 편인지보다 얼마나 고통이 있는지를 봅니다. 그래서 중재자가 되고, 그래서 신뢰가 생기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요즘 세상엔 함흥차사咸興差使 보내는 사람은 많으나, 돌아오는 사람은 드물다. 약속은 화려하고, 선언은 요란하지만 결과는 늘 “연락 중”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함흥차사를 기다리듯 책임을 기다린다. 함흥차사란, 보내놓고도 돌아오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조선의 옛 이야기 속 한 장면이지만 지금의 세상에선 전혀 낯설지 않다. 말로는 백성을 위한다 하고, 공약으로는 내일을 약속하지만 정작 물을 때가 되면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말은 업을 만들고, 행은 과보를 낳는다.” 말만 남기고 행이 없다면 그 말은 공덕이 아니라 허업虛業이 된다. 오늘의 정치도, 오늘의 조직도, 오늘의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보내는 약속이 아니라 돌아오는 책임이 사람을 판단한다. 함흥차사가 되지 말라. 보내졌다면 돌아오고, 맡았다면 응답하라. 그것이 사람의 도리이며 시대가 요구하는 수행이다. 한 줄 법문 “말은 떠났는데 책임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 자리는 이미 공空이다.”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계포일낙季布一諾”, 한 번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는 뜻이다. 한나라의 장수 계포는 말 한마디에 생명을 걸었고, 사람들은 그의 약속을 천금보다 무겁게 여겼다. 약속이 곧 인격이던 시대였다. 그러나 오늘의 사회는 어떠한가. 정치의 약속은 선거가 끝나면 희미해지고, 조직의 공언은 상황 논리에 밀리며, 일상의 다짐조차 “그때 가 봐서”라는 말로 가볍게 흘러간다. 약속은 남발되고, 책임은 실종되었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말은 마음의 그림자요, 행위는 말의 증거이다.” 말이 가벼워지면 마음이 흐려지고, 마음이 흐려지면 업業은 어그러진다. 불교에서 경계하는 망어업妄語業, 즉 거짓말의 업은 남을 속이는 죄 이전에 자기 자신을 무너뜨리는 업이다. 약속을 어긴다는 것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다. 그 말을 믿고 방향을 정한 사람의 인연을 끊는 일이며, 공동체의 신뢰를 무너뜨리는 행위다. 사회가 병들기 시작하는 지점은 언제나 말과 행동이 어긋나는 순간부터였다. 물론 사람은 완벽할 수 없다. 지키지 못할 상황도 생긴다. 그러나 계포일낙의 본뜻은 ‘절대 실수하지 말라’는 명령이 아니다. 지키려는 마음을 버리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지킬 수 없게 되었을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어부지리漁父之利” 란, 두 사람이 다투는 사이, 아무 노력도 하지 않은 제삼자가 이익을 얻는다는 말이다. 이 말은 단순한 고사성어가 아니라 오늘의 사회 구조를 정확히 꿰뚫는 거울이다. 현대사회는 끊임없이 사람들을 갈라놓는다. 세대와 세대, 지역과 지역, 이념과 이념, 직장 안에서는 부서와 부서, 온라인에서는 진영과 진영이 맞서 싸운다. 서로를 향한 말은 점점 거칠어지고, 상대의 말은 들으려 하지 않는다. 옳고 그름보다 이기고 지는 것이 먼저가 된다. 그러나 그 치열한 싸움의 끝에서 정작 웃고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유튜브 불교연합방송 바로가기 다투는 당사자들이 아니다. 댓글로 싸우는 시민도 아니고, 현장에서 고생하는 노동자도 아니다. 갈등을 설계한 자, 분열을 이용한 자, 침묵 속에서 이익을 챙긴 자가 어부가 된다. 불교의 눈으로 보면 어부지리는 단순한 기회주의가 아니라 번뇌가 낳은 업의 결과다. 분노가 커질수록 판단은 흐려지고, 집착이 강해질수록 시야는 좁아진다. 그 틈을 타 누군가는 말없이 그물을 던진다. 부처님께서는 “분노는 분노로써 그칠 수 없고, 지혜로써만 멈출 수 있다”고 하셨다. 어부지리가 반복되는 이유는 사람들이 자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선우후락先憂後樂”이란, 먼저 근심하고, 뒤에 즐거워한다는 이 말은 고단한 도덕 교훈이 아니라 지도자의 자세이자 공동체의 양심을 가리킨다. 그러나 오늘의 사회는 어떤가, 근심은 남에게 맡기고, 즐거움은 먼저 차지하려는 풍경이 낯설지 않다. 문제가 생기면 책임은 아래로 흐르고, 성과가 나면 공은 위로 올라간다. 선우후락은 교과서 속 문장이 되었고, 현실은 ‘선락후우先樂後憂’로 뒤집힌 듯하다. 불교의 눈으로 보면 이 현상은 단순한 도덕의 붕괴가 아니라 마음의 방향이 바뀐 결과다. 부처님께서는 “자신을 먼저 살피고, 타인을 나중에 헤아리라”고 하셨다. 이 말은 이기적으로 살라는 뜻이 아니다. 자신의 마음이 바르지 않으면 어떤 자리에서도 바른 선택을 할 수 없다는 경계다. 선우후락의 ‘우憂’는 불안이나 걱정이 아니라 책임의 다른 이름이다. 내가 이 자리에 있는 이유, 내 결정이 누군가의 삶에 미칠 파장, 그 무게를 먼저 느끼는 것이 ‘선우’다. 그러나 현대사회는 속도를 미덕으로 삼고, 성과를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한다. 그 과정에서 “조금만 더 살피자”는 목소리는 느리다고 배제되고, “잠깐 멈추자”는 제안은 비효율로 취급된다. 그 결과, 즐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만학천봉萬壑千峰이란, 수없이 많은 골짜기와 천 개의 봉우리가 겹겹이 이어진 장관을 뜻하는 말이다. 웅장하고 아름다운 풍경을 가리키는 동시에, 한눈에 가늠하기 어려운 복잡한 세계의 모습을 비유한다. 오늘의 사회는 이 말과 너무도 닮아 있다. 우리는 지금 정보의 골짜기와 선택의 봉우리를 넘나들며 산다. 뉴스는 쏟아지고, 의견은 갈라지며, 옳고 그름조차 단순하지 않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묻기도 전에 이미 수많은 길 앞에 서 있다. 현대인은 흔히 말한다. “세상이 너무 복잡하다.” 그러나 문제는 세상이 복잡해진 것이 아니라, 마음의 중심을 잃은 채 그 안을 걷고 있다는 데 있다. 불교의 시선에서 보면 만학천봉은 피해야 할 풍경이 아니다. 수행자는 골짜기가 많다고 길을 포기하지 않고, 봉우리가 높다고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풍경의 크기가 아니라 내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아는 마음이다. 오늘의 사회는 끊임없이 비교하게 만든다. 저 봉우리는 왜 저리 높아 보이는지, 나는 왜 저 골짜기에 머무는지. 그러나 산은 경쟁하지 않는다. 각 봉우리는 제 높이로 존재하고, 각 골짜기는 제 깊이로 자리를 지킨다. 문제는 우리가 남의 봉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남가일몽南柯一夢.”이란, 한때는 분명히 현실이었던 것이, 돌아보면 한낱 꿈처럼 사라져버린 일을 이르는 말이다. 인생의 영화榮華와 성공, 권세와 명예가 모두 이 말 안에 들어 있다. 오늘의 세상은 이 남가일몽을 너무도 자주, 너무도 크게 반복한다. 유튜브 불교연합방송 바로가기 우리는 흔히 말한다. “그때는 잘나갔지.” “한 시절을 풍미했지.” 그러나 부처님의 시선에서 보면, 그 모든 것은 잠시 스쳐 간 인연일 뿐이다. 붙잡을 수 없고, 오래 머물지 않으며, 결국은 놓아야 할 것들이다. 문제는 꿈을 꾸는 것이 아니라, 꿈인 줄 모르고 사는 것이다. 권력에 취하고, 돈에 매달리고, 인정에 흔들리며, 그것이 영원할 것처럼 살아간다. 그러다 어느 날 건강이 무너지고, 관계가 끊어지고, 자리가 사라질 때 비로소 우리는 묻는다.“도대체 무엇을 위해 이렇게 애써 왔는가.” 불교는 이 질문을 피하지 않는다. 오히려 분명히 말한다. 이 세상의 모든 성취는 무상無常하며, 집착할수록 괴로움이 커진다고. 남가일몽을 깨닫는 순간은 허무의 순간이 아니라, 지혜의 문이 열리는 순간이다. 꿈에서 깨어나야 비로소 길이 보인다. 꿈에서 깨어나야 비로소 사람의 소중
법왕청신문 이존영 기자 | “자강불식自强不息.”은 스스로를 강하게 하되, 그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말은 오늘의 우리에게 유난히 아프게 다가온다. 우리는 너무 자주 지치고, 너무 쉽게 포기하며, 쉬어야 할 때와 멈춰야 할 때를 혼동한 채 살아가기 때문이다. 유튜브, 불교연합방송 바로가기 현대사회는 끊임없이 속도를 요구한다. 성과는 즉각적이어야 하고, 결과는 눈에 보여야 하며, 노력은 숫자로 환산되기를 강요받는다. 그러다 보니 많은 이들이 “강해져야 한다”는 말 앞에서 스스로를 몰아붙인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 속 자강불식은 그런 강요가 아니다. 그것은 남보다 앞서기 위한 힘이 아니라, 어제의 나를 넘어 오늘의 나를 세우는 꾸준함이다. 자강불식은 쉼을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바른 쉼을 포함한다. 쉬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라, 마음이 무너진 채로 방치하지 않겠다는 서원이다. 몸이 피곤하면 쉬되, 마음의 방향은 놓치지 않는 것. 이것이 수행자의 자강불식이다. 우리는 실패 앞에서 자주 자신을 탓한다. 그러나 불교는 말한다. 실패는 업의 끝이 아니라 과정이라고.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니라, 다시 일어나는 마음의 태도다. 한 번 더 숨을 고르고, 한 걸음
법왕청신문 이존영 기자 | “호사수구狐死首丘”란 여우는 죽을 때, 자신이 살던 굴이 있는 언덕을 향해 머리를 둔다고 한다. 이는 죽음 앞에서도 자신의 근본과 뿌리를 잊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오래된 말은 오늘의 우리 사회를 향해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유튜브 불교연합방송 바로가기 우리는 지금 어디를 향해 살고 있는가. 현대사회는 빠르다. 성과는 속도로 평가되고, 성공은 숫자로 증명되며, 사람의 가치는 직함과 재산으로 분류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고향을 떠나고, 관계를 끊고, 전통을 가볍게 여기며, 심지어 자신의 신념마저 상황에 따라 바꾸는 데 익숙해졌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은 분명하다. 근본을 잃은 성취는 공허하며, 뿌리 없는 성공은 오래가지 못한다. 아무리 높은 자리에 올라도,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해도, 자신이 누구인지 잊는 순간 그 삶은 이미 흔들리고 있다. 호사수구는 과거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다. 시대에 뒤처지라는 가르침도 아니다. 그것은 아무리 멀리 가더라도, 어디서 왔는지를 잊지 말라는 수행의 기준이다. 부모의 은혜, 스승의 가르침, 공동체의 품, 그리고 스스로 세운 삶의 원칙. 이것이 바로 우리가 머리를 두어야 할
법왕청신문 강경희 기자 | 도청도설道聽塗說이란, 길에서 듣고 길에서 옮긴 말이라는 뜻이다. 확인되지 않은 소문, 근거 없는 이야기, 책임지지 않는 전언을 가리킨다. 공자는 이 말을 경계하며, 말이 가벼워질수록 세상은 무거워진다고 보았다. 오늘의 사회는 이 오래된 경계가 가장 절실한 시대다. 우리는 지금 정보의 홍수 속에 사는 난민이다. 손안의 화면을 켜는 순간, 수많은 말들이 우리를 향해 쏟아진다. 사실과 의견, 해석과 추측, 진실과 조작이 뒤섞여 경계를 흐린다. 빠르게 퍼지는 말일수록 확인은 늦고, 자극적인 주장일수록 책임은 가볍다. 그 결과, 도청도설은 개인의 실수가 아니라 구조적 유혹이 되었다. 불교의 눈으로 보면, 도청도설의 뿌리는 번뇌다. 남보다 먼저 말하고 싶은 마음, 내가 옳다는 확인을 받고 싶은 마음, 분노와 두려움을 증폭시키는 말에 기대고 싶은 마음. 이 마음이 말을 앞서게 하고, 말이 업을 만든다. 부처님께서 정어正語를 강조하신 이유는 분명하다. 말은 가장 빠르게 업을 쌓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거짓 정보는 예전의 헛소문과 다르다. 알고리즘이 선택하고, 조회수가 증폭하며, 분노가 연료가 된다. 사실 여부보다 확산 가능성이 기준이 된다.
법왕청신문 이존영 기자 | 傍若無人방약무인 이란, 곁에 사람이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는 뜻이다. 타인을 의식하지 않고 거리낌 없이 말하고 행동하는 태도를 이르는 말인데, 이 오래된 사자성어가 오늘날처럼 현실적으로 다가온 적은 드물다. 지하철에 앉아 있으면 풍경은 익숙하다. 누군가는 큰 소리로 통화를 하고, 누군가는 영상을 스피커로 틀어놓으며, 누군가는 식당에서 옆 테이블을 아랑곳하지 않고 사적인 이야기를 쏟아낸다. 몸은 사람들 사이에 있지만, 마음은 혼자만의 방에 들어가 있는 듯하다. 휴대폰 하나가 우리를 공동체에서 분리된 개인으로 만들어 놓았다. 문제는 기술이 아니다. 문제는 의식의 방향이다. 불교의 눈으로 보면 방약무인은 예의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공부의 실패다.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내 말과 행동이 누구에게 닿는지, 그 인연을 살피는 마음이 사라질 때 방약무인은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부처님께서는 늘 “모든 행위에는 상대가 있다”고 가르치셨다. 혼자 밥을 먹어도, 혼자 걷고 있어도 우리는 늘 누군가와 공간을 나누고 있다. 지하철은 작은 사회이고, 식당은 잠시 스쳐 가는 공동체다. 그 안에서의 말과 행동은 곧 공덕이 되거나 업이 된다. 휴대폰은 편리하지만
법왕청신문 이정 기자 | 교언영색巧言令色이란, 말은 공교롭고, 표정은 부드럽지만 그 속에 진심이 없는 상태를 이르는 말이다. 공자는 이 교언영색을 깊이 경계했다. 왜냐하면 달콤한 말과 아첨하는 얼굴은 사람의 마음을 흐리게 하고, 관계를 왜곡하며, 결국 스스로의 도를 잃게 만들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가르침 역시 이 지점에서 분명하다. 말은 수행의 결과이지, 수행을 대신할 수는 없다. 입으로는 자비를 말하면서 마음에 탐욕이 가득하다면, 겉으로는 공손하지만 속으로는 이익만 계산한다면 그 말과 표정은 이미 업을 쌓는 도구가 된다. 오늘의 사회는 교언영색이 유리한 구조를 만들고 있다. 진실보다 이미지가 앞서고, 마음보다 말솜씨가 평가받는다. SNS의 웃는 얼굴, 과장된 친절, 듣기 좋은 말들이 넘쳐나지만 그 속에서 우리는 종종 공허함을 느낀다. 왜냐하면 마음은 거짓을 알아보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바른 말, 정어正語는 말을 잘하는 것이 아니라 말과 마음이 하나가 되는 상태를 뜻한다. 진심이 담기지 않은 말은 결국 스스로를 속이게 되고, 그 속임은 언젠가 반드시 드러난다. 교언영색을 경계하라는 말은 남을 비난하라는 뜻이 아니다. 먼저 자기 자신의 말과 얼굴을 돌아
법왕청신문 강경희 기자 | 명절이 다가오면 마음이 무거워진다는 사람들이 많다. 벌초 날짜를 맞추는 일, 먼 산소를 오가는 길, 차례상 준비에 드는 시간과 비용, 그리고 “이걸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라는 현실적인 고민까지 한곳에서 모두 해결 한다. 이제 추모의 방식도 바뀌어야 할 때다. 묘지가 아닌 ‘봉안’, 사당이 아닌 ‘법당’에 모시는 추모가 새로운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다. 충청북도 청주에 위치한 벽사초불정사는 이러한 변화에 가장 앞서 응답한 사찰이다. 힘든 벌초 대신, 평안한 봉안 해마다 반복되는 벌초는 어르신에게는 체력의 부담이고, 젊은 세대에게는 시간과 거리의 벽이다. 벽사초불정사는 “왜 고인을 모시는 일이 이렇게 힘들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했다. 그 해답이 바로 천년의 뜰 봉안당이다. 이곳에서는 산소 대신 실내 봉안 날씨 걱정 없는 참배 관리 부담 없는 영구 안치 가 가능하다. 벌초는 더 이상 후손의 의무가 아니라, 시대가 바꿔야 할 관습이 되었다. 사당 대신 법당, 영구위패와 봉안 전통적으로 집안에 사당을 두거나 위패를 모시는 일은 큰 부담이었다. 공간도 필요하고, 관리도 쉽지 않다. 벽사초불정사는 사당 대신 법당에 모시는 영구위패 봉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