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오늘날 우리는 인공지능(AI)이 인간의 일자리를 대신하고, 하루가 다르게 기술이 변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세상은 점점 더 빨라지고 있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오히려 더 쉽게 흔들린다. 조금만 실패해도 좌절하고, 남과 비교하며 자신의 길을 잃어버리는 사람이 늘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다시 떠올려야 할 말이 있다. '有志者事竟成유지자사경성.' 뜻을 가진 사람은 결국 그 뜻을 이룬다는 말이다. 이 사자성어의 핵심은 성공이 아니라 '뜻志'에 있다. 돈을 많이 버는 것이 뜻이 아니고,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이 뜻이 아니다. 자신의 삶이 왜 존재하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를 아는 사람이 진정 뜻을 세운 사람이다. 불교에서는 이를 발심發心이라 한다. 한 번 올바른 마음을 일으키면 그 마음이 수행이 되고, 수행은 습관이 되며, 습관은 결국 인생을 바꾸는 힘이 된다. 높은 산도 첫걸음이 없으면 오를 수 없고, 깊은 바다도 작은 물방울이 모여 이루어진다. 큰 성공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기적이 아니라, 포기하지 않은 수많은 평범한 하루가 모여 이루는 결실이다. 우리가 존경하는 위인과 장인, 예술가와 기업가들도 처음부터 특별했던 사람은 아니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열 사람의 눈이 모두 보고 있다는 뜻으로, 아무도 보지 않는 것 같아도 결국 모든 행동은 드러난다는 말이다. 오늘날 우리는 정보와 소통의 시대를 살아간다. 한 사람의 행동은 순식간에 세상으로 퍼지고, 진실은 언젠가 반드시 모습을 드러낸다. 십목소시十目所視는 2천 년 전의 가르침이지만, 지금의 우리 사회에 더욱 절실한 덕목이다. 사람들은 흔히 "아무도 모르겠지"라고 생각하며 작은 거짓과 편법을 시작한다. 그러나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눈이 있다. 이웃의 눈, 사회의 눈, 역사와 양심의 눈이다. 결국 신뢰를 잃는 것은 한순간이지만, 신뢰를 회복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불교에서는 이를 인과因果의 이치로 설명한다. 선한 원인은 선한 결과를 낳고, 악한 원인은 결국 그에 따른 결과를 가져온다. 남을 속일 수는 있어도 자신의 마음과 업業은 속일 수 없다. 오늘날 공직자에게는 청렴이, 기업에는 윤리가, 언론에는 진실이, 교육에는 정직이, 종교에는 수행자의 본분이 요구된다. 이러한 가치가 바로 십목소시의 정신이다. 특히 인공지능과 디지털 시대에는 모든 기록이 남는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사회적 평가로 이어진다. 그래서 사람 앞에서만 바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견위치명見危致命은 단순히 전쟁터에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뜻만은 아니다. 오늘날에는 공동체가 위기에 처했을 때 자신의 이익보다 정의와 책임을 먼저 생각하는 삶의 자세를 의미한다. 우리는 지금 다양한 위기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경제적 불안, 저출산과 고령화, 환경문제, 사회적 갈등, 도덕성의 약화까지 국가와 사회를 흔드는 문제들이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진정한 위기는 문제가 생긴 것보다 문제를 보고도 외면하는 사람이 많아질 때 시작된다. 견위치명의 정신은 거창한 희생만을 말하지 않는다. 부정부패를 보고 침묵하지 않는 공직자, 학생을 끝까지 책임지는 교사, 환자를 위해 밤을 새우는 의료인, 화재 현장으로 뛰어드는 소방관, 나라를 지키는 군인과 경찰, 어려운 이웃을 위해 자신의 시간을 내어 봉사하는 시민. 이 모두가 오늘날의 견위치명을 실천하는 사람들이다. 불교에서는 이를 보살행菩薩行이라 한다. 자신의 안락보다 중생의 고통을 먼저 살피고, 어려운 곳으로 스스로 걸어가는 삶이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한 사람의 자비가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 된다." 세상은 영웅 몇 사람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리에서 책임을 다하는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빨리'라는 말에 익숙해졌습니다. 빨리 성공해야 하고, 빨리 돈을 벌어야 하며, 빨리 남들보다 앞서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조금만 늦어도 뒤처지는 것 같고, 잠시 쉬어가면 실패한 인생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자연은 한 번도 서두른 적이 없습니다. 봄은 겨울을 밀어내지 않습니다. 꽃은 옆에 핀 꽃과 경쟁하지 않습니다. 소나무는 사계절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하늘을 향해 자랍니다. 자연은 자신의 때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는 스무 살에 꿈을 이루고, 누군가는 마흔이 넘어 자신의 길을 찾습니다. 늦었다고 생각했던 출발이 오히려 가장 아름다운 결승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의 길에도 지름길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 바르게 걷는 사람이 결국 가장 멀리 갑니다. 산길을 오르다 보면 급하게 뛰어가는 사람은 금세 지쳐 쉬게 됩니다. 반면 천천히 자신의 호흡에 맞춰 걷는 사람은 어느새 정상에 먼저 도착해 있습니다. 인생도 산을 오르는 길과 다르지 않습니다. 남과 비교하면 조급해지고, 어제의 나와 비교하면 성장하게 됩니다. 젊은 시절에는 속도가 경쟁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비가 오는 날이면 사람들은 하늘을 올려다본다. 먹구름이 가득하고 빗줄기가 세차게 내리면 마치 세상이 온통 어두워진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아무리 큰 비도 결국은 그친다는 사실을 인생에도 비가 내린다. 실패의 비가 내릴 때가 있고, 이별의 비가 내릴 때가 있으며, 질병과 고통의 비가 내릴 때도 있다. 젊은 시절에는 작은 실패도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느껴진다. 시험에 떨어지고, 취업에 실패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면 앞이 보이지 않는 긴 터널 속에 갇힌 듯하다. 그러나 세월은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 하나를 가르쳐 준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 부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존재는 변화한다고 하셨다. 이를 무상無常이라 한다. 행복도 영원하지 않지만, 괴로움도 영원하지 않다. 봄이 오면 꽃이 피고, 여름이 지나면 가을이 오며, 겨울이 지나면 다시 봄이 찾아온다. 고통도 마찬가지다. 지금의 눈물이 영원할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눈물이 오히려 삶의 지혜가 되는 날이 온다. 비를 맞고 자란 나무가 더 깊이 뿌리내리듯, 시련을 견딘 사람은 더 단단해진다. 오늘 힘든 시간을 지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너무 조급해하지 말자.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오월동주吳越同舟는 중국 춘추시대 서로 원수였던 오吳나라와 월越나라 사람들이 같은 배를 타고 강을 건너다가 폭풍을 만나자, 살아남기 위해 힘을 합쳤다는 데서 유래한 말이다. 불교의 눈으로 보면 오월동주는 단순한 처세의 지혜가 아니라 인연因緣의 가르침이다. 세상을 살다 보면 좋아하는 사람만 만날 수 없고, 뜻이 같은 사람하고만 일할 수도 없다.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사회에서도, 때로는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과 같은 길을 가야 하고, 같은 일을 해야 하며, 같은 배를 타야 한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원한은 원한으로 풀리지 않고, 오직 자비로써 풀린다”고 하셨다. 내가 상대를 미워하는 동안 가장 괴로운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다. 상대를 향한 미움은 불씨를 움켜쥔 손과 같아서, 던지기 전에 먼저 내 손을 태운다. 오월동주의 지혜는 원수를 친구로 만들라는 뜻이 아니다. 서로 다르더라도 함께 살아갈 방법을 찾고, 서로 미워하더라도 공동의 목적을 위해 힘을 모으며, 갈등 속에서도 더 큰 가치를 위해 손을 잡을 줄 아는 성숙한 마음을 말한다. 한 척의 배가 뒤집히면 적도 함께 물에 빠지고, 나도 함께 물에 빠진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상대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우주의 진리는 큰 북과 같다. 크게 치면 큰 소리가 나고, 작게 치면 작은 소리가 난다. 이 한마디는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사회적 관계와 삶의 구조를 꿰뚫는 깊은 법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좋은 결과를 원한다. 인정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고, 존중받고 싶어 한다. 그러나 정작 자신이 세상에 어떤 ‘소리’를 내고 있는지는 돌아보지 않는다. 북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강하게 치면 강하게 울리고, 약하게 치면 약하게 울린다. 세상 또한 다르지 않다. 내가 남을 대하는 태도, 말의 무게, 행동의 깊이, 그 모든 것이 결국 나에게 되돌아오는 울림이 된다. 거친 말로 세상을 대하면, 세상은 거친 소리로 응답한다. 이기적인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면, 결국 고립이라는 메아리가 돌아온다. 반대로 따뜻한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면, 그 온기는 반드시 다시 나에게 돌아온다. 이것이 인과因果다. 이것이 우주의 질서다. 오늘날 사회를 보면, 큰 소리를 내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깊은 울림을 가진 사람은 드물다. 소리는 크다고 해서 울림이 깊은 것이 아니다. 진정한 울림은 ‘진심’에서 나온다. 작게 말해도 마음이 담기면 멀리 퍼지고, 크게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우리는 흔히 많이 배우고 많이 알아야 지혜롭다고 생각한다. 많은 정보를 알고, 많은 경험을 쌓아야 비로소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불교에서 말하는 참된 지혜는 그와 다르다.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를 깊이 이해하는 데서 시작된다. 문일지십聞一知十,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안다는 뜻이다. 이 말은 단순한 총명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겉으로 드러난 하나의 현상 속에서 그 이면의 원리와 본질을 꿰뚫어 보는 지혜를 말한다. 어느 날 한 제자가 부처님께 물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하면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는 조용히 말씀하셨다. “많이 들으려 하지 말고, 깊이 들으라.” 제자는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부처님은 다시 말씀하셨다. “하나의 가르침을 듣고도 그 속에서 열 가지를 깨닫는 사람이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이다.” 이 말씀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깊은 의미를 던진다. 우리는 수많은 정보 속에 살고 있다. 하루에도 수십 가지의 이야기를 듣고, 수많은 지식을 접한다. 그러나 정작 우리의 삶은 그만큼 깊어지고 있는가. 많이 듣고 많이 아는 것과 지혜롭게 사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문일지십의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산길을 걷다 보면 때때로 눈에 띄는 꽃이 있습니다. 화려하지도 않고,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애쓰지도 않지만 조용히 그 자리에 피어 있는 꽃이 있습니다. 바로 도라지꽃입니다. 보랏빛 다섯 갈래 꽃잎이 별처럼 펼쳐진 이 꽃은 마치 하늘을 향해 마음을 열고 있는 듯한 모습입니다. 도라지꽃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이 꽃은 왜 이렇게 조용하게 피어 있을까?” 사람들은 화려한 꽃을 좋아합니다. 큰 꽃, 향기 짙은 꽃, 멀리서도 눈에 띄는 꽃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자연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가장 오래 살아남는 꽃들은 대부분 조용한 꽃들입니다. 도라지꽃도 바로 그런 꽃입니다. 도라지는 꽃보다 먼저 뿌리를 깊이 내립니다. 땅속 깊이 내려간 뿌리는 세월을 견디고 비바람을 견디며 그 자리를 지킵니다. 그렇게 뿌리가 단단해지면 비로소 작은 꽃을 피웁니다. 불교에서 수행을 이야기할 때도 이와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수행을 특별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높은 산에 들어가거나 오랜 시간 좌선을 해야만 수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을 바르게 하고, 욕심을 줄이며, 인내하는 것이 곧 수행이다.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세상은 언제나 바쁘게 돌아갑니다. 사람들은 아침부터 밤까지 일을 하고, 목표를 향해 달려가며 쉼 없이 시간을 보냅니다.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 노력하고, 더 높은 자리에 오르기 위해 경쟁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분주하게 살아가다 보면 어느 순간 마음이 메마르고 삶의 여유를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바로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마음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음풍농월吟風弄月입니다. 음풍농월이란 말 그대로 바람을 읊고 달을 희롱한다는 뜻입니다.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을 벗 삼아 시를 짓고 마음의 흥취를 나누며 즐긴다는 의미입니다. 옛 선비들은 자연을 바라보며 마음을 닦고 삶의 깊이를 찾았습니다. 바람이 불면 바람을 느끼고, 달이 뜨면 달빛을 바라보며 마음을 쉬게 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낭만이 아니라 삶의 균형을 지키는 지혜였습니다. 불교에서도 자연은 중요한 스승입니다. 산과 물, 바람과 달은 말없이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칩니다. 바람은 머무르지 않고 지나가며 집착을 내려놓으라고 말하고, 달빛은 어둠 속에서도 고요히 세상을 비추며 마음의 평화를 가르쳐 줍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자연 속에서 마음을 비추고 삶을 돌아봅니다. 오늘날 우리는 너무 많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어둠은 언제나 밖에서 오는 것처럼 보입니다. 세상이 어렵다 하고, 사람이 변했다 하고, 형편이 나쁘다 하며 우리는 쉽게 말합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십시오. 어둠은 본래 실체가 없습니다. 빛이 없을 뿐입니다. 어둠은 밀어낼 대상이 아니라 밝힐 대상입니다. 등불은 어둠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왜 이렇게 캄캄하냐”고 묻지 않습니다. 그저 자기 심지에 불을 붙일 뿐입니다. 작은 불꽃 하나가 넓은 방을 밝히고, 한 사람의 마음을 살리고, 한 시대의 방향을 바꿉니다. 등불은 크지 않아도 됩니다. 꺼지지 않으면 됩니다. 지혜로운 이는 환경을 탓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압니다. 환경은 조건일 뿐, 결정은 자기 마음이 한다는 것을. 비가 오면 우산을 쓰고, 눈이 오면 발걸음을 조심하며, 바람이 불면 몸을 낮추면 됩니다. 하늘을 원망한다고 날씨가 바뀌지 않습니다. 수행이란 무엇입니까? 바깥을 바꾸는 일이 아니라 안의 불을 지키는 일입니다. 누가 나를 헐뜯어도 마음의 등불을 꺼뜨리지 않는 것, 세상이 거칠어도 자비의 불씨를 놓지 않는 것, 형편이 궁해도 원력을 줄이지 않는 것. 그것이 수행입니다. 어둠이 깊을수록 등불은 더 또렷해집니다. 고난이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무위도식無爲徒食이란 말은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먹고 사는 것을 뜻한다. 이 말은 단순히 게으름을 꾸짖는 말이 아니다. 불교에서는 이 말 속에 삶에 대한 태도를 묻는 깊은 뜻이 담겨 있다. 부처님은 수행자들에게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몸은 공양을 받는 몸이니, 그 공양만큼 세상에 보답하라.” 공양을 받는다는 것은 책임을 진다는 뜻이다. 불교에서 밥 한 끼는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다. 한 숟가락 밥에는 농부의 땀과 자연의 은혜, 그리고 공동체의 신뢰가 담겨 있다. 그래서 출가자는 말한다. “이 밥값을 무엇으로 갚을 것인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먹는 삶, 즉 무위도식이란 몸은 살아 있으나 마음은 이미 수행을 떠난 상태를 말한다. 불교에는 ‘무위無爲’라는 말이 있다. 이는 억지로 꾸미지 않는 자연스러운 삶을 뜻한다. 그러나 무위와 무위도식은 전혀 다르다. 무위는 집착을 내려놓은 행위이고, 무위도식은 책임을 내려놓은 태도다. 부처님은 하루도 빈손으로 살지 않으셨다. 말 한 마디, 발걸음 하나, 침묵조차도 중생을 이롭게 하는 법문이 되게 하셨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헛되이 살지 않으셨다. 일하지 않는 손보다, 마음을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세상은 늘 편을 가르려 합니다. 내 편과 네 편, 옳고 그름 이전에 서로의 자리를 먼저 나눕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길은 언제나 그 한가운데에 서 있었습니다. 치우치지 않고, 무리에 휩쓸리지 않는 자리. 그 자리를 가리켜 우리는 무편무당無偏無黨이라 부릅니다. 무편무당이란, 아무 생각도, 아무 입장도 가지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깨어 있는 태도입니다. 치우침은 마음이 먼저 결론을 내릴 때 생기고, 무리는 생각을 대신해 판단해 줄 때 만들어집니다. 그 순간, 우리는 편해지지만 진실에서는 멀어집니다. 부처님께서는 “중도는 양쪽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양쪽을 다 살피는 지혜”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무편무당은 옳고 그름을 가리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사람이 아니라 사안을 보고, 감정이 아니라 인연을 살피라는 가르침입니다. 오늘의 사회를 비추는 무편무당 오늘 우리는 의견보다 진영을 먼저 묻고, 사실보다 소속을 먼저 확인합니다. 그러나 불교의 눈으로 보면 그 순간부터 갈등은 시작됩니다. 무편무당의 사람은 누구의 말인지보다 무슨 말인지를 듣고, 어느 편인지보다 얼마나 고통이 있는지를 봅니다. 그래서 중재자가 되고, 그래서 신뢰가 생기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요즘 세상엔 함흥차사咸興差使 보내는 사람은 많으나, 돌아오는 사람은 드물다. 약속은 화려하고, 선언은 요란하지만 결과는 늘 “연락 중”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함흥차사를 기다리듯 책임을 기다린다. 함흥차사란, 보내놓고도 돌아오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조선의 옛 이야기 속 한 장면이지만 지금의 세상에선 전혀 낯설지 않다. 말로는 백성을 위한다 하고, 공약으로는 내일을 약속하지만 정작 물을 때가 되면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말은 업을 만들고, 행은 과보를 낳는다.” 말만 남기고 행이 없다면 그 말은 공덕이 아니라 허업虛業이 된다. 오늘의 정치도, 오늘의 조직도, 오늘의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보내는 약속이 아니라 돌아오는 책임이 사람을 판단한다. 함흥차사가 되지 말라. 보내졌다면 돌아오고, 맡았다면 응답하라. 그것이 사람의 도리이며 시대가 요구하는 수행이다. 한 줄 법문 “말은 떠났는데 책임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 자리는 이미 공空이다.”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계포일낙季布一諾”, 한 번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는 뜻이다. 한나라의 장수 계포는 말 한마디에 생명을 걸었고, 사람들은 그의 약속을 천금보다 무겁게 여겼다. 약속이 곧 인격이던 시대였다. 그러나 오늘의 사회는 어떠한가. 정치의 약속은 선거가 끝나면 희미해지고, 조직의 공언은 상황 논리에 밀리며, 일상의 다짐조차 “그때 가 봐서”라는 말로 가볍게 흘러간다. 약속은 남발되고, 책임은 실종되었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말은 마음의 그림자요, 행위는 말의 증거이다.” 말이 가벼워지면 마음이 흐려지고, 마음이 흐려지면 업業은 어그러진다. 불교에서 경계하는 망어업妄語業, 즉 거짓말의 업은 남을 속이는 죄 이전에 자기 자신을 무너뜨리는 업이다. 약속을 어긴다는 것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다. 그 말을 믿고 방향을 정한 사람의 인연을 끊는 일이며, 공동체의 신뢰를 무너뜨리는 행위다. 사회가 병들기 시작하는 지점은 언제나 말과 행동이 어긋나는 순간부터였다. 물론 사람은 완벽할 수 없다. 지키지 못할 상황도 생긴다. 그러나 계포일낙의 본뜻은 ‘절대 실수하지 말라’는 명령이 아니다. 지키려는 마음을 버리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지킬 수 없게 되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