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눈이 내린 날이었다. 하얀 침묵이 사찰 마당을 덮고, 탑은 말없이 시간을 세우고 있었다. 벽사초불정사 천년의 뜰은 그날도 묻지 않았다. 누가 왔는지, 무엇을 안고 왔는지. 그저, 오면 머물 자리를 내어줄 뿐이었다. [담화총사 : 네이버 동영상 2,500개 바로보기] 마당 한쪽에는 ‘천년의 뜰’이라는 작은 현판 아래 연화동자가 두 손을 모은 채 앉아 있다. 아이의 얼굴에는 근심이 없고, 눈은 감겨 있으나 마음은 열려 있다. 그 모습은 말한다. 기도란, 슬픔을 설명하는 일이 아니라 슬픔을 내려놓을 자리를 찾는 일이라고. 기도는 홀로 하지만, 기억은 함께한다 사진 속 또 다른 장면. 노란 장삼을 입은 두 사람이 봉안단 앞에서 조용히 합장하고 있다. 이곳은 장례의 끝이 아니다. 기억의 시작이다. 이름이 놓인 자리, 사진이 머무는 칸, 향이 끊이지 않는 이 공간에서 사람들은 다시 가족이 된다. 핵가족의 시대, 산골은 멀어지고 수목장은 남아 있는 이들의 발길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사찰 봉안당은 다르다. 여기에는 늘 사람이 오고, 늘 기도가 흐른다. 누군가 떠난 자리를 아무도 비워두지 않는다. 천도는 의식이 아니라, 관계다 불교에서 말하는 천도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양웅상쟁兩雄相爭”,이란 두 마리의 용이 서로 맞붙는다는 뜻이다. 실력이 비슷한 강자들끼리의 치열한 대결을 이르는 말이다. 오늘의 정치판을 바라보면 이 말보다 정확한 표현이 없다. 서로를 향해 “내가 옳다”, “네가 틀렸다”고 외친다. 정책보다 말이 앞서고, 비전보다 공격이 먼저 나온다. 양쪽 모두 스스로를 정의라 부르지만 정작 국민의 삶은 뒷전으로 밀려난다. 불교의 눈으로 보면 이것은 단순한 경쟁이 아니라 아我를 중심에 둔 싸움, 즉 아집의 충돌이다. 부처님께서는 “아집이 깊어질수록 고통은 커진다”고 하셨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승리만을 향한 정치는 결국 모두를 괴롭히는 업을 낳는다. 양웅상쟁의 특징은 분명하다. 싸움은 화려하지만 남는 것은 상처뿐이다. 정치판에서 두 용이 싸우는 동안 시장은 흔들리고, 서민의 삶은 불안해지며, 청년은 미래를 잃고, 어르신은 노후를 걱정한다. 그러나 싸움의 중심에 선 이들은 그 고통을 직접 겪지 않는다. 말과 권력의 세계에서 승패만 계산할 뿐이다. 불교는 묻는다. “이 싸움은 중생을 이롭게 하는가.”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싸움은 이미 수행의 길에서 벗어난 것이다. 유튜브 불교연합방송 바로
법왕청신문 김학영 기자 | 부처님께서 설하신 諸法無我제법무아는 불교의 핵심 진리이자, 오늘의 시대를 가장 깊이 성찰하게 하는 가르침이다. ‘모든 법에는 고정된 자아가 없다.’ 이 말은 나를 부정하라는 선언이 아니다. 오히려 나를 괴롭히는 허상의 ‘나’를 알아차리라는 초대다. 우리는 흔히 ‘나’가 단단히 존재한다고 믿는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 “나는 이 정도 가치가 있다”, “나는 이 자리를 잃으면 끝이다.” 그러나 제법무아의 눈으로 보면, 이 모든 규정은 잠정적 표지일 뿐 실체가 아니다. 생각과 감정, 지위와 역할, 성공과 실패는 조건 따라 생겨났다가 조건 따라 사라진다. 고정된 ‘나’는 그 어디에도 없다. 현대 사회의 고통은 대부분 이 고정된 자아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된다. 비교는 자아를 강화하고, 경쟁은 자아를 방어하게 만든다. 인정받지 못하면 자아는 상처받고, 비판을 받으면 존재 전체가 흔들린다. 그러나 제법무아를 이해하면 보인다. 상처받는 것은 ‘나’가 아니라, ‘나라고 믿어온 생각’이라는 사실이이다. 제법무아는 무책임을 허락하지 않는다. “나는 없으니 책임도 없다”는 해석은 부처님의 가르침과 거리가 멀다. 오히려 고정된 자아가 없기에, 우리는
법왕청신문 장규호 기자 | 해가 저문다. 연말은 늘 바쁘다. 결산과 정리, 송년과 약속이 이어진다. 그러나 묻지 않으면 그냥 지나간다. 우리는 올해 정말 깨어 있었는가. 취생몽사醉生夢死, 옛사람들이 남긴 이 네 글자는 연말의 거울처럼 우리 앞에 선다. 취한 듯 살고, 꿈속에서 죽는 삶. 오늘날 이는 방탕이 아니라 무기력한 정상 상태로 위장한다. 바쁘게 살았으니 괜찮다고, 남들도 다 이렇게 산다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그러나 한 해가 끝나는 이 시점에서 우리는 정직해져야 한다. 열심히 살았는가보다 중요한 질문은 의식하며 살았는가다. 청년은 출구 없는 경쟁 속에서 꿈을 미루었고, 중장년은 책임이라는 이름으로 삶을 연기했다. 사회는 속도를 강요했고, 깊이를 요구하지 않았다. 그 결과 많은 이들이 살아 있으되 자기 삶의 주인이 되지 못한 채 한 해를 보냈다. 불교에서 말하는 새해는 달력이 바뀌는 순간이 아니다. 마음이 깨어나는 순간이다. 하루라도, 한 선택이라도 ‘이것은 내 삶이다’라고 자각하는 때 그때가 곧 신년이다. 연말은 버리는 시간이다. 실패뿐 아니라, 의식 없이 반복한 습관과 남의 기준으로 살았던 생각을 내려놓는 시간이다. 그래야 새해가 들어올 자리가 생긴다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견강부회, 말이 마음을 속일 때, 말은 생각보다 빠르고, 마음은 생각보다 약하다. 그래서 사람은 종종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말을 먼저 앞세운다. 이치보다 말이 앞서고, 책임보다 설명이 길어질때 우리는 그것을 견강부회라 부른다. 견강부회는 남을 속이기 위한 언어가 아니라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마음이 만들어낸 방어다. 그러나 말로 지은 방어벽은잠시 몸을 가릴 수는 있어도 양심까지 지켜주지는 못한다. 이 장은 말의 기술이 아닌 말의 태도를 묻는다. 그리고 묻는다. 지금 우리의 말은 진실을 향하고 있는가, 아니면 마음을 숨기고 있는가. 여러분, 말이 많은 세상일수록 마음은 더 조용해야 합니다. 담화총사는 늘 이렇게 말합니다. “말은 마음의 그림자입니다. 그림자가 길어질수록 해는 이미 기울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 말의 무게를 돌아보게 하는 사자성어 하나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견강부회牽強附會입니다. 견강부회의 뜻 견강부회란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억지로 끌어다 자기 주장에 꿰맞추는 태도입니다. 담화총사는 이것을 “말로 짓는 방어벽”이라 부릅니다. 밖에서는 단단해 보이지만 안에서는 마음이 숨을 쉬지 못합니다. 틀렸음을 인정하지 못할수록
법왕청신문 김학영 기자 |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 굳이 따져보지 않아도 드러나는 진실을 우리는 불문가지不問可知라 부른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현대사회는 이 불문가지의 영역에 가장 많은 말과 해명을 쏟아붓는 시대다. 분명해 보이는 사안일수록 더 복잡한 설명이 뒤따르고, 결과가 이미 말해주고 있음에도 사람들은 끝없는 변명을 늘어놓는다. 오늘의 사회를 보면, 책임을 지는 사람보다 설명을 잘하는 사람이 살아남는다. 잘못이 드러나면 사과보다 해명이 먼저 나오고, 사실보다 맥락이 앞세워진다. 기업의 위기 앞에서는 ‘의도는 달랐다’는 말이 반복되고, 정치의 현장에서는 결과보다 ‘과정의 불가피성’이 강조된다. 그러나 대중은 알고 있다. 말이 길어질수록 진실은 가려지고 있다는 것을. 불문가지는 결과의 철학이다. 반복되는 선택은 그 사람의 가치관을 드러내고, 지속된 행태는 조직의 본질을 증명한다. 신뢰는 하루아침에 무너지지 않는다. 작은 거짓이 쌓이고, 책임 회피가 반복되며, 말과 행동의 균열이 누적될 때 비로소 붕괴된다. 이 모든 과정은 굳이 질문하지 않아도 이미 충분히 드러난다. SNS와 미디어의 시대는 불문가지를 더욱 선명하게 만든다. 한 번의 말실수보다 더 위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마음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자주 지친다. 그러나 옛사람들은 말했다. “음풍농월 吟風弄月”, 바람을 읊고 달빛을 희롱하며 자연 속에서 마음을 덜어내는 법이 있다고.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의 마음을 가볍게 스쳐 지나가며 번뇌를 털어낸다. 달은 손에 잡히지 않지만, 어둠을 은은하게 밝히며 길을 비춰준다. 그 앞에 서면 사람의 마음은 어느새 고요해지고, 크고 작은 고민들은 밤하늘에 흩어져 초연한 빛으로 가라앉는다. 요즘 우리는 너무 많은 소음을 안고 살아간다. 계획, 속도, 경쟁, 불안… 그러나 자연은 언제나 한결같이 말한다. “조금 천천히 가도 괜찮다.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를 들어보라.” 이 한마디가 마음의 복이 되고, 삶의 지혜가 된다. 음풍농월은 단순한 풍류가 아니다. 그것은 삶을 아름답게 바라보는 태도, 그리고 자기 마음을 지키는 방법이다. 바람을 읊는다는 것은, 순간의 감정을 흘려보내는 연습이요, 달을 희롱한다는 것은, 어둠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는 지혜를 뜻한다. 달빛을 바라보면 깨닫게 된다. 빛은 소리 없이도 모든 것을 밝힌다는 사실을. 사람도 마찬가지다. 큰 말 없이, 과시하지 않고,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世上세상에 사람은 많으나, 참으로 자신보다 연장자를 벗으로 삼을 줄 아는 이는 드물다. 사람은 나이를 먹으면서 지혜를 얻고, 세월 속에서 마음의 무게를 배우며, 경험을 통해 삶의 깊이를 더한다. 그래서 나보다 먼저 세상을 걸어간 이의 걸음에는 늘 배울 것이 있다. 佛陀불타께서는 말씀하셨다. “지혜로운 이는 배우기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어진 이는 가르침을 나누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로 스승에게서 배우고, 때로는 벗에게서 깨닫는다. 그리고 진정한 도인은 나이와 지위가 아니라, 배움의 자세로 성장한다. “自己보다 年長者를 벗으로 삼으면 얻는 바가 많을 것이다.” 이 말씀은 곧, 겸손과 존중의 가르침이다. 겸손한 마음은 모든 덕의 근본이며, 존중의 마음은 모든 관계의 뿌리이다. 경험이란 단순한 과거가 아니다. 그것은 성공의 최고 지도자요, 인생의 나침반이다. 한 번의 실패도, 한 번의 인연도, 한 번의 눈물도 모두 나를 단단하게 만드는 법문法文이 된다. 曇華風月은 흩날리는 꽃잎과 고요한 달빛처럼, 배움은 조용히 마음속에 스며든다. 오늘 나보다 먼저 피어난 꽃을 바라보며, 내일의 내가 배워야 할 길을 찾을 때, 그곳에 참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法句經(법구경) 223게송』에 대한 법문 부드러움으로 화냄을 이겨라. 좋음으로 나쁨을 이겨라. 베품으로 인색한 자를 이겨라. 참말로 거짓말을 이겨라. = 동영상= 세상은 언제나 대립과 갈등 속에 흔들린다. 분노는 분노를 낳고, 탐욕은 탐욕을 키운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부드러움으로 화를 이기라.” 이 말은 약함을 뜻하지 않는다. 진정한 부드러움이란, 자신의 마음을 다스릴 줄 아는 강자의 자비심이다. 칼로 칼을 맞서면 상처만 남지만, 물은 바위를 만나도 부서지지 않는다. 그것이 柔유 의 힘이다. 좋음으로 나쁨을 이겨라. 악을 악으로 갚으면 끝없는 원이 생긴다. 그러나 선으로 악을 감싸면, 그 불길은 더 이상 번지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불佛의 길, 자비慈悲의 길이다. 베품으로 인색한 자를 이겨라. 주는 자는 잃지 않고, 쥐는 자는 얻지 못한다. 나누는 마음은 복이 되어 돌아오고, 탐하는 마음은 스스로를 가둔다. 베품은 물과 같아서, 낮은 곳으로 흐르며 모든 생명을 살린다. 참말로 거짓말을 이겨라. 거짓은 순간의 이익을 주지만, 진실은 세월을 이긴다. 한마디 참된 말은 천마디의 허언보다 무겁고 빛난다. 진실한 마음은 사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후생가외”란 말은 단지 젊은이를 두려워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 속에는 존중尊重과 희망希望, 그리고 깨달음의 연속성이 담겨 있습니다. 공자는 말했다. “後生可畏焉, 焉知來者之不如今也.후생가외언, 언지래자지불여금야 ” “뒷세대는 두려워할 만하다. 어찌 그들이 오늘의 우리보다 못하다고 장담하겠는가.” 불교의 가르침도 이와 같습니다. 모든 존재는 불성佛性을 지닌다. 따라서 젊은이들 또한 그 마음 안에 미래의 부처, 즉 내세의 깨달은 자가 숨어 있습니다. 그 가능성을 경외하는 마음이 바로 “후생가외”의 참된 뜻입니다. 오늘의 어른이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을 하느냐에 따라 내일의 젊은이들이 어떤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갈지가 정해집니다. 우리가 지혜로움을 보여주면, 젊은 세대는 법法을 배우고, 우리가 탐욕과 분노에 물들면, 젊은 세대는 그 그림자를 닮습니다. 그러므로 후생가외란 단지 젊은이를 두려워하는 말이 아니라, 그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라는 경책警策의 말씀입니다. 이 시대의 젊은이들은 혼란 속에서도 답을 찾고 있습니다. 기계가 사람을 대신하고, 정보가 지혜를 가리는 세상 속에서 그들은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부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담화총사의 오늘의 시는 매일 정해진 주제나 테마를 바탕으로 창작되는 시입니다. 하루의 감정, 상황, 또는 전 세계적인 사건들에 대한 시적 반응을 담아내며, 정기적이고 지속적인 시 창작 활동을 통해 자아의 성장과 사회적 메시지 전달을 목표로 합니다. ‘오늘의 시’를 시작하는 마음 “하루의 끝에서 시 한 편, 그 날의 끝을 시로 마무리하는 것은 내면의 고요함을 발견하고 세상과 조화를 이루는 순간입니다. 勿爲受惠者물위수혜자, 恒爲施與者항위시여자, 받는 자가 되지 말고, 늘 주는 자가 되라. 세상은 주고받음으로 이어지지만, 선인은 ‘받음’보다 ‘줌’에서 참된 자유를 찾습니다. 주는 마음은 집착을 비워내고, 그 빈자리엔 자비가 꽃처럼 피어납니다. 묻노라, 주인공아 그대는 누구인가? ‘나’라는 존재는 이름도, 형체도, 생각도 아닌 깨달음의 길 위에서 스스로를 비추는 한 줄기 빛일 뿐이다. ‘나’를 알되, ‘나’에 집착하지 말라. 집착하면 아상我相이 생기고, 상이 생기면 고통이 뒤따른다. 그러나 마음을 비워 선善을 쌓고, 무루복無漏福을 닦는다면, 그대의 내면엔 맑은 바람이 불고, 행복은 자연스레 찾아올 것이다. 베풀고 또 베풀라. 그것이 곧 불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흙은 품고, 불은 밝히니, 삶은 다시 피어나고, 세상은 다시 순환한다. 마음을 흙처럼 온유하게, 불처럼 따뜻하게 하라. 그 마음이 곧 부처의 마음이요, 그 가정이 곧 극락의 들녘이리라. 산은 마음이고, 바람은 법이며, 물은 자비요, 달은 지혜이다. 모든 자연이 부처의 말씀이고, 모든 침묵이 깨달음의 소리이다. 서문序文 禪是佛心 敎是佛語,선시불심 교시불어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고,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다. 이 말은 당나라의 대덕 규봉 종밀(圭峯宗密, 780~841) 대사가 선禪과 교敎의 대립을 넘어 ‘선교일치禪敎一致’의 길을 열며 남긴 말이다. 『선가귀감』에 이르기를 “세존이 세 곳에서 마음을 전하신 것은 선禪의 뜻이 되고, 한 평생 설하신 말씀은 교敎의 문이 되었다.” 하였으니, 이 말이 곧 선시불심禪是佛心, 교시불어敎是佛語의 근원이다. 그렇다면 수행자의 삶이란 곧 시詩이며, 그 시의 언어가 바로 선禪의 향기이다. 법당에서의 설법만이 불교가 아니라, 산사山寺의 바람결과, 수행자의 걸음 속에도 부처의 말씀이 깃든다. 목차Contents 禪是佛心 敎是佛語 (서문) 규봉 종밀圭峯 宗密 대사의 선교일치禪敎一致 사상을 바탕으로, 수행자의 삶과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曇華의 山房閑談은 수행자이자 예술가 曇華總師담화총사의 심원한 사유와 수행의 궤적을 담은 불교 예술 산문집이다. 산은 마음이고, 바람은 법이며, 물은 자비요, 달은 지혜이다. 모든 자연은 부처님의 말씀이고, 모든 침묵은 깨달음의 소리이다. 曇華의 山房閑談은 수행자이자 예술가인 曇華總師담화총사가 산중의 고요 속에서 써 내려간 선禪과 시詩의 기록이다. 바람이 법문이 되고, 달빛이 설법이 되며, 자연의 모든 숨결이 부처님의 음성으로 들려온다. 이 책은 선과 교의 조화, 禪敎一致선교일치의 사상을 바탕으로, 삶 속에서 깨달음을 실천하는 길을 제시한다. 산방의 침묵, 소나무의 바람, 들판의 달빛, 그리고 사계절의 순환 속에 담긴 불심의 언어는 읽는 이의 마음을 고요히 비추며, 일상의 모든 순간이 수행임을 일깨워준다. “나는 나에게 길을 묻는다. 마음은 고요로 대답한다.” 예술로 불법을 전하고, 사랑으로 세상을 구하는 曇華總師의 서원이 담긴 불교 예술 산문집이다. 목차 요약 서문序文 禪是佛心 敎是佛語선시불심 교시불어, 선은 부처님의 마음, 교는 부처님의 말씀 규봉 종밀圭峯宗密 대사의 선교일치 사상을 바탕으로, 수행자의 삶과 시의 길을 하나로 엮다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약속과 은혜를 기억한 두 마리 소의 이야기는, 하찮게 여겨질 수 있는 짐승조차도 받은 은혜를 잊지 않고 사람의 진심을 위해 목숨을 걸었음을 보여줍니다. 약속을 저버린 사람, 진심을 증명한 소의 이 이야기 속에는 우리가 잊고 지낸 ‘신뢰’와 ‘보답’의 도리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참된 보시와 진심은 말없이도 전해집니다. 이제, 이 따뜻한 고전 설화를 통해 약속의 가치를 다시 새겨봅니다. 옛날 어느 마을에 부모를 일찍 여의고 친척 하나 없이 홀로 살아가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산에서 나무를 한 짐 해 내려오던 중, 그늘에 앉아 쉬고 있는데, 밭에서 나이 든 노인이 홀로 밭을 갈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모르는 사이였지만 청년은 다가가 정중히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연세가 많으신데 어찌 혼자 밭을 갈고 계십니까? 자제분도 없으신가요?” 노인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습니다. “형제도, 자식도 없어 내가 몸소 밭을 일구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지.” 청년은 안타까운 마음에 바로 삽을 들고 밭을 갈기 시작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집으로 돌아가 쉬십시오. 저는 해가 질 때까지 밭을 다 갈아놓겠습니다. 해질 무렵 마을 어귀로 오셔서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종종 이렇게 말합니다. "지옥 같다", "배가 고파 죽겠다", "짐승 같은 세상", "질투와 분노가 가득하다" 이런 표현들은 결코 문학적인 수사가 아닙니다. 그 자체로 불교에서 말하는 육도중생六道衆生의 삶의 실상입니다. 불교는 세상을 여섯 갈래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 이 육도는 단순한 내세의 공간이 아니라, 우리의 심리적 상태와 삶의 국면을 상징합니다. 고통이 극심한 지옥도, 채워지지 않는 탐욕의 아귀도, 무지와 본능에 휘둘리는 축생도, 분노의 아수라도, 기쁨과 괴로움이 교차하는 인간도, 쾌락에 도취되어 방심하는 천상도, 모두 우리가 겪고 있는 삶의 얼굴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 지장보살地藏菩薩이 계십니다. 불교 신앙 가운데 가장 자비로운 존재로 불리는 지장보살은, “지옥이 텅 빌 때까지 열반에 들지 않겠다”는 대원大願을 세우셨습니다. 그는 언제나 가장 밑바닥에서, 가장 외면당한 존재 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을 살아가는 중생 옆에 계십니다. 그것은 영웅적인 신화가 아니라, 자비가 가장 절실한 곳에 머무는 삶의 태도입니다. 현대의 삶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