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현진 작가의 대표작 「송학천년도松鶴千年圖」가 지리산 가피암迦披庵에 봉헌되어 신도들과 함께 부처님 전에 올려졌다. 이번 봉헌은 일정 대종사의 인준을 거쳐 이뤄진 것으로, 불자들과 지역 신도들의 깊은 신심 속에 법당에 안착하게 되었다. 천년송과 학이 전하는 이야기에는 옛날 동해와 맞닿은 깊은 산골에는 ‘천년송’이라 불린 노송老松이 있었다. 그 꼭대기에는 언제나 두 마리의 학, ‘백설白雪’과 ‘청운靑雲’이 찾아와 앉았다. 가뭄과 병충해로 마을이 메마르던 어느 해, 천년송이 시들 위기에 처하자 두 학은 하늘로 날아올라 은빛 이슬을 구해와 소나무 뿌리에 매일 떨어뜨렸다. 그 덕분에 소나무는 다시 푸르름을 되찾았고, 마을은 평화와 생명을 이어갈 수 있었다. 이 전설을 담은 송학의 풍경은 이후 ‘송학천년’이라 불리며, 천년의 우정과 장수長壽, 변치 않는 평화平和의 상징으로 전해졌다. K-민화의 현대적 의미, 현진 작가는 이 전설을 바탕으로 「송학천년도」를 그려냈다. 작품 속 송학은 단순한 길상화吉祥畵가 아니라, 사람과 자연, 그리고 세대를 잇는 인연을 품은 상징으로 재해석되었다. 특히 이번 봉헌은 한국 민화의 맥을 이어 세계 속에 K-민화를 알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부처님께서 석가족 마을에 머무실 때의 일이다. 제자 아난이 문득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좋은 스승善知識과 좋은 벗善道伴, 그리고 좋은 제자善隨徒를 갖는 것은 성스러운 도를 수행하는 데 있어 절반을 이루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바르게 말씀드린 것입니까?” 그러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난아, 그런 말 하지 말라. 좋은 스승, 좋은 벗, 좋은 제자가 있다는 것은 도 수행의 절반이 아니라 전부이다. 그대들은 나를 좋은 벗으로 삼음으로써 생로병사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근심과 슬픔, 괴로움에서 해탈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진정한 벗을 만나는 것은 수행의 일부가 아니라 수행 전체를 관통하는 길임을 알라.” 사람은 혼자 살아갈 수 없으며, 혼자 수행할 수도 없다. 좋은 벗을 만나면 잘못된 길로 들어가지 않고, 바른 길에서 나아갈 용기와 힘을 얻는다. 반대로 나쁜 벗을 가까이하면 바른 마음이 흐려지고, 어리석음과 욕망에 이끌리기 쉽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일러주신 말씀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크나큰 울림이 된다. 좋은 벗은 단순히 함께 있는 이가 아니라, 내 마음을 깨우고 도의 길로 이끌어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2025년 세계통계(World of Statistics)와 Adventourely가 공동 발표한 ‘유럽 41개국 야간 안전도 조사’에서 크로아티아가 2년 연속 1위를 차지하며 ‘가장 안전한 밤길을 가진 나라’로 자리매김했다. 이번 조사에서 크로아티아는 75.93점(Numbeo 기준)을 기록하며, 슬로베니아(73.74점), 아이슬란드(71.55점), 조지아(69.72점), 스위스(69.35점)를 제치고 최상위권에 올랐다. 반면, 프랑스(35.28점), 벨기에(40.88점), 벨라루스(41.05점), 영국(42.26점), 스웨덴(43.4점) 등 일부 서유럽 주요국은 하위권에 머무르며 체감 안전도 면에서 낮은 평가를 받았다. 발칸반도 국가의 두드러진 치안 수준 이번 조사에서는 발칸반도와 발트해 지역 국가들의 치안 체감도가 서유럽 주요국보다 높다는 사실이 주목받았다. 슬로베니아와 함께 상위권에 오른 크로아티아는 경제 규모와 무관하게 안전한 사회 환경을 유지하는 국가로 평가됐다. 전문가들은 “GDP 같은 경제 지표가 높은 국가가 반드시 안전하다고 볼 수는 없다”며 “범죄율뿐 아니라 사회적 신뢰, 지역 불균형, 언론의 보도 양상 등 복합적인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우리는 흔히 묻습니다. "왜 나는 이렇게 태어났는가?" "왜 저 사람은 모든 것을 갖고 나는 아무것도 없는가?" 그러나 『논어』에도 말했듯이 死生有命, 富貴在天이라 하였습니다. 죽고 사는 것은 하늘이 내린 명(命)에 따르고, 부와 귀함은 천도天道에 달려 있다는 뜻입니다. 이는 운명을 체념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불교에서는 이것을 전생의 업業, 즉 인연과 인과因果의 결과로 이해합니다. 내가 지은 만큼 받고, 내가 뿌린 만큼 거두며, 내가 베푼 만큼 채워지는 것이 이 우주의 섭리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할 일은 단 하나입니다. 주어진 명을 원망하지 말고, 주어진 업을 탓하지 말며, 지금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해 선업善業을 짓는 것입니다. 세속의 눈으로 보면, 죽음은 두렵고, 가난은 괴롭습니다. 그러나 명命을 바로 아는 사람은 죽음조차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며, 가난조차 수행의 밭으로 삼습니다. “복은 하늘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짓는 것이다.” 진정한 부귀는 마음의 평화에서 옵니다. 참된 성공은 남과의 비교가 아니라 내면의 성장에서 비롯됩니다. 오늘 하루, 나에게 주어진 삶의 명을 감사히 여기며, 어떤 순간에도 선업을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부처님께서 석가족 마을에 머무실 때의 일이다. 제자 아난이 문득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좋은 스승善知識과 좋은 벗善道伴, 그리고 좋은 제자善隨徒를 갖는 것은 성스러운 도를 수행하는 데 있어 절반을 이루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바르게 말씀드린 것입니까?” 그러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난아, 그런 말 하지 말라. 좋은 스승, 좋은 벗, 좋은 제자가 있다는 것은 도 수행의 절반이 아니라 전부이다. 그대들은 나를 좋은 벗으로 삼음으로써 생로병사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근심과 슬픔, 괴로움에서 해탈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진정한 벗을 만나는 것은 수행의 일부가 아니라 수행 전체를 관통하는 길임을 알라.” 사람은 혼자 살아갈 수 없으며, 혼자 수행할 수도 없다. 좋은 벗을 만나면 잘못된 길로 들어가지 않고, 바른 길에서 나아갈 용기와 힘을 얻는다. 반대로 나쁜 벗을 가까이하면 바른 마음이 흐려지고, 어리석음과 욕망에 이끌리기 쉽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일러주신 말씀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크나큰 울림이 된다. 좋은 벗은 단순히 함께 있는 이가 아니라, 내 마음을 깨우고 도의 길로 이끌어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우리는 흔히 묻습니다. "왜 나는 이렇게 태어났는가?" "왜 저 사람은 모든 것을 갖고 나는 아무것도 없는가?" 그러나 『논어』에도 말했듯이 死生有命, 富貴在天이라 하였습니다. 죽고 사는 것은 하늘이 내린 명(命)에 따르고, 부와 귀함은 천도天道에 달려 있다는 뜻입니다. 이는 운명을 체념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불교에서는 이것을 전생의 업業, 즉 인연과 인과因果의 결과로 이해합니다. 내가 지은 만큼 받고, 내가 뿌린 만큼 거두며, 내가 베푼 만큼 채워지는 것이 이 우주의 섭리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할 일은 단 하나입니다. 주어진 명을 원망하지 말고, 주어진 업을 탓하지 말며, 지금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해 선업善業을 짓는 것입니다. 세속의 눈으로 보면, 죽음은 두렵고, 가난은 괴롭습니다. 그러나 명命을 바로 아는 사람은 죽음조차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며, 가난조차 수행의 밭으로 삼습니다. “복은 하늘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짓는 것이다.” 진정한 부귀는 마음의 평화에서 옵니다. 참된 성공은 남과의 비교가 아니라 내면의 성장에서 비롯됩니다. 오늘 하루, 나에게 주어진 삶의 명을 감사히 여기며, 어떤 순간에도 선업을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부처님께서 기원정사에 머무실 때, 어느 날 보시의 공덕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불이 났을 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불이 나면 슬기로운 사람은 먼저 바람이 부는 방향, 물이 있는 위치를 잘 살펴 가장 먼저 귀중한 물건과 생필품을 안전한 곳으로 옮깁니다. 그래서 집은 타더라도 재산은 지킬 수 있고,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허둥지둥 아무 생각 없이 불만 바라보다 결국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보시도 이와 같습니다 인생이 덧없음을 아는 사람은 인생의 '불길'이 닥치기 전에 미리미리 보시의 공덕을 쌓습니다. 그리하여 복덕福德의 씨앗이 되고, 그 삶은 따뜻한 열매를 맺습니다. 하지만 보시의 참뜻을 모르는 사람은 끝까지 움켜쥐기만 하다 결국 재산도 덕도 모두 잃고 말게 됩니다. 그는 세상을 떠나며 그동안 쌓아둔 재물은 흩어지고, 탐욕과 집착은 고통의 원인이 됩니다. 진정한 보시란? 탐욕 없는 마음으로 주는 것입니다. 대가나 보답을 바라는 마음이 아니라, 순수한 자비와 이타심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보시를 잘 실천하는 사람은 덕 있는 이들의 보호를 받고,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으며, 넓은 신뢰와 명예를 얻습니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현대인의 건강 고민은 대부분 "어떻게 먹을까", "어떤 약이 좋을까"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건강은 입이 아니라 발에서 시작됩니다. 여기, 한 문장이 그 진리를 꿰뚫습니다. 천공재족망天功在足忙이란 하늘이 내린 공덕은 ‘몸을 움직이고, 발이 부지런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는 뜻입니다. 단순한 말 같지만, 그 안에는 건강과 수행, 삶의 균형이 모두 담겨 있습니다. 건강은 움직이는 자에게 옵니다. “좋은 약을 먹었으니 이제 괜찮아질 거야.”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지만, 움직이지 않는 몸에는 약도 소용없습니다. 가장 좋은 약은 ‘걷는 것’입니다. 걷는 동안 몸속에서는 혈액이 돌고, 면역력이 오르며, 마음의 응어리까지 풀어집니다. 움직임은 약이고, 걷는 것은 기도입니다. 한 걸음 한 걸음마다 내 몸이 살아나고, 내 삶이 정리됩니다. 걷는 자는 마음도 맑아집니다, 걷는다는 것은 단순한 신체 활동이 아닙니다. 땅의 숨결을 느끼고, 하늘의 기운을 들이마시며, 자연과 하나 되는 수행의 길입니다. 불가에서는 이를 ‘행선行禪’, 즉 움직이는 선禪이라 불렀습니다. 걷는 동안, 무겁던 생각이 가벼워지고, 얽히고설킨 감정이 정돈됩니다. 조용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글 / 청운법사 | “이 길이 맞는 걸까?” “나는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 걸까?” 누구나 한 번쯤 스스로에게 묻는다. 특히 수행과 믿음의 길을 걷는 이라면 더욱 그렇다. 이럴 때 우리에게 큰 위안을 주는 말씀이 있으니, 바로 『법화경法華經』의 핵심 사상인 “개삼현일開三顯一”이다. 이는 곧 세 가지 길을 열어 하나의 진실을 드러낸다는 뜻이다. 부처님께서는 중생의 근기와 성향이 제각기 다름을 알고, 그에 따라 성문승聲聞乘, 연각승緣覺乘, 보살승菩薩乘이라는 세 가지 수행의 길을 제시하셨다. 그러나 그 모든 길의 궁극은 단 하나, 불승佛乘이었다. 목적지는 같되, 각자의 길이 다를 뿐이라는 이 가르침은 오늘 우리에게도 깊은 울림을 준다. 성문은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성聲)’ 수행하여 괴로움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이들이다. 오늘날로 말하면 명상을 통해 심리적 고통을 다스리려 하거나, 계율을 지키며 평온한 삶을 지향하는 이들이라 할 수 있다. 이 길은 자기 구원의 길이다. 때론 ‘이기적’이라는 오해도 받지만, 그 또한 수행의 문을 통과하는 하나의 과정임을 『법화경』은 인정하고 품어낸다. 연각은 부처 없이도 자연과 인생의 무상함을 통찰해 스스로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성라자로마을, 한센인을 위한 한국 최초의 구라사업기관으로 75년간의 여정을 걷다. 1950년 6월 2일,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경기도 광명리 신기촌에 한 작은 요양원이 설립되었다. 이름은 ‘성라자로요양원’. 이는 성경 속 한센병 병자였던 ‘라자로’의 이름을 따 지어진 것이며, 한국 천주교 최초의 구라사업기관으로 무의탁 한센병 환우들의 치료와 자립을 목적으로 출발했다. 이 요양원을 세운 이는 미국 메리놀 외방선교회(M.M.)의 조지 M. 캐롤 몬시뇰. 그는 한국 사회에 소외된 이들을 위한 보금자리를 마련하고자 했고, 전쟁과 가난, 차별 속에서 버려졌던 800여 명의 한센인들이 그의 뜻에 따라 모여들었다. 이듬해 1951년, 마을은 현재의 경기도 안성시 보개면 오전리로 자리를 옮기며 본격적인 복지마을로서의 기반을 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1952년, 한 젊은 사제가 이 마을의 역사에 전환점을 가져온다. 이경재 알렉산델 신부(초대 원장)는 성라자로마을에서 30여 년을 헌신하며 한센인의 치료와 인권 회복, 자립 지원에 평생을 바쳤다. 그는 “마음이 먼저 치유되어야 몸이 낫는다”는 철학으로 의료·교육·신앙·문화 전반에 걸친 돌봄 시스템을
법왕청신문 이존영 기자 부처님오신날 축시"曇華總師 담화총사 作" 今此佳辰 如來降誕금차가신 여래강탄 오늘은 여래께서 자비의 빛으로 이 세상에 오신 날. 어둠 깊은 세상에 자비의 등불 하나 켜지니, 그 빛 따라 모든 생명에 희망이 스며듭니다. 세속의 고해에서 헤매던 중생들이 그 손길 하나에 안식을 얻고 그 미소 하나에 눈물을 씻습니다. 부처님, 이 작은 몸과 마음으로 어떻게 그 큰 은혜를 다 갚으리이까. 다만 오늘, 이 연등을 올리며 서원합니다. 고요히 피는 연꽃처럼 성냄 없이 살겠습니다. 자비를 삶의 등불로 삼아 가는 길마다 빛이 되겠습니다. 무명 속에서도 지혜로 깨어 있고, 혼탁한 세상 속에서도 맑은 향기 머금겠습니다. 불기 이천오백육십구년, 오늘, 이 봉축의 등불 아래 우리는 다시 태어납니다. 연꽃처럼 맑고, 달빛처럼 고요히, 부처님 따라 자비의 길을 걷겠습니다.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법왕청신문 장규호 기자 | 청주에 위치한 벽사초불정사僻邪招佛精舍가 단순한 불교사찰을 넘어, 민족의 기억과 세계 평화를 품은 복합문화성지로 새롭게 부상하고 있다. 이곳은 북관대첩비 복제비, 세계불교 초대법왕 일붕 서경보 존자 기념관, 6·25 사진전, 고승 유작 및 미술작품, 세계 외교사진 전시까지 총망라된 공간으로 조성 중이다. 이 대역사의 중심에는 담화 이존영 이사장(북관대첩비 민족운동중앙회 이사장, 외교저널 발행인)이 있다. 철창 속 100년, 다시 국민 앞에 선 북관대첩비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는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정문부 장군이 함경도에서 일본군 1만여 명을 격퇴한 ‘북관대첩’을 기념하여 1707년(숙종 34년) 세워진 것이다. 하지만 이 비는 1905년, 러·일 전쟁 당시 일본군 제2사단장 이케다 마시스케에 의해 강탈돼, 도쿄 야스쿠니신사 구석 철창 속에 1톤의 돌을 얹은 채 방치되는 수난을 겪었다. 이후 국제 불교계와 민족운동가, 문화유산 전문가들의 공동 노력, 그리고 담화 이존영 이사장의 외교적 설득과 협의를 통해, 2005년 비석은 반환되어 2006년 북한 길주군 본래의 자리에 복원되었고, 현재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보 제193호로 지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