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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법왕 일붕 서경보 큰스님 전기집 오! 한국의 달마여 7

7. 무명무상한 심령체를 찾아

법왕청신문 이존영 기자 | 초대법왕 일붕 서경보 큰스님 전기집 오! 한국의 달마여

 


佛敎와 文學


불교에는 팔만대장경이란 거대한 경전經典이 있다. 이는 종합적인 성격을 가진 방대한 종합 체이다. 

 

따라서 보는 관점과 입장에 따라 여러 종류로 나누어진다. 예를 들면 철학자, 과학자, 문학자, 정치가, 교육자, 미술가, 경제학자, 군사연구가들이 각각 자기의 기준에 따라 팔만대장경을 다르게 평가하는 것이다. 

 

옛 문장가 소동파蘇東坡가 노산盧山이란 높은 산을 이렇게 그린 시가 있다.
橫着成嶺側着峰하니,
遠近高低自不同이라,
不見盧山眞面目은, 
只緣身在此山中이라.
이는 다 같은 노산이지만 멀리서 횡(옆)으로 보면 큰 재가 되고 몸을 기울여 올려다보면 높은 봉우리가 된다. 멀고 가까이서 보는 높낮이가 같지 않다.

 

그러나 노산의 참모습을 보지 못하는 것은 몸이 노산 가운데에 있기 때문이란 의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불교는 보는 자의 생각과 기준에 따라 달리 표현된다. 그래서 한 가지로 규정짓기 어려운 것이다.

 

불교는 마음 심(心)자 하나를 온갖 형태로 전개 한 것이다. 그런데도 ‘이것이 불교다'라고 단언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 갈래가 워낙 복잡하기 때문이다.

 

불교는 마음의 근본 바탕을 철학으로 밝히고, 마음의 정서를 문학으로 묘사하고, 마음으로 생각한 것을 실천하여 열매를 맺는 것을 과학으로 나타낸다….

 

 

우리가 불교의 정의를 쉽게 내리지 못하는 것은 마음속에 앉아서 마음을 그리는 격이 되므로 마치 노산 안에서는 노산의 참모습을 보기가 어려운 것과 같다. 이런 古詩가 있다.

雪裡長松雨後山은,
看時容易畵時難이라.
早知不合時入眼인데,
寧買腦脂寫杖丹이라.
즉 눈雪 가운데 서 있는 소나무나 비가 내린 후의 청산은 보기는 쉬워도 그리기는 어려운 것이다. 비록 그릴 수 있더라도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다면 차라리 연지분이나 사서 모란꽃이나 그려보겠노라는 뜻이다.

 

불교에는 오묘한 철리哲理와 심원한 진리眞理와 숭고한 교리敎理가 수없이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이는 각자가 노력하지 않는 한 아무리 설명하고 가르쳐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야말로 사람이 물을 마심에 차고 더운 맛을 자신만이 알게 된다는 여인음수냉완자지如人飮水自知와 같은 것이다.

 

때문에 나는 雪裡長松과 雨後靑山의 진경(眞境)을 그리기보다는 연지를 사서 모란꽃을 그리는 격으로 불교의 심오한 철리를 뒤로하고 文學이나 소개하고자 한다.

대장경과 십이분경
불교의 팔만대장경은 열두 가지의 양식으로 성립된 관계로 십이분경十二分經이라고도 부른다. 이를 차례로 알아보자.

 

첫째, 장행長行 즉 글줄이다. 다시 말하면 산문체인데 서론, 본론, 결론의 형식을 가진 것도 있다. 이러 세기면 무난하다.

 

둘째, 중송重頌 즉 운문韻文을 붙인 장편의 시다. 이 중송은 장행에서 말해온 논지를 다시 한번 알기 쉽도록 큰 뜻만을 함축시켜 거듭 송(頌)으로 지은 것이다. 예를 들면 <화엄경> <법화경> <열반경> 같은 경전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여러 가지의 설(說)이 엇갈린다. 

 

어떤 이는 석가여래께서 설교하실 때에 처음부터 듣지 못하고 중간에 들어와서 듣는 자를 위해서 만든 것이라고도 하고, 인도인들은 무슨 글이든 외우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기억이 쉽게 만든 것이란 주장도 있다.

 

셋째, 수기(授記)이니 경(經) 가운데 말해놓은 의리(義理)에 대하여 문답으로 해설함과 동시에 제자들에게 예언하신 것이다. 석가여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지금부터 몇 년생을 지나 이러이러한 나라에 태어나서 부처成佛를 이루리라”는 구절이다.


넷째, 고기송孤起頌이니 오언 또는 칠언七言으로된 운문시다. 고기孤起란 말은 長行과 같은 산문에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된 시송詩頌이란 뜻이다. 이는 불소행찬, 佛所行讚이나 법구경, 法句經같은 것이다.

 

다섯째, 무문자설無問自說로<불설아미타경>같은 것이다. 일반적인 경전은 보살이나 성문聲聞제자가 석가세존께 의문스러운 점을 청문請問하는식으로 설법의 발단이 전개된다. 그러나 아미타경만은 아무도 묻는 사람이 없이 석가께서 스스로 제자 사리불에게 극락정토의 광경을 말한 것이다.

 

여섯째, 연기緣起로서 인연설이다. 인연설이란, 견불문법見佛聞法의 인연을 말한다.

 

일곱째, 비유譬喩로서 적당한 예시와 비교로 경전의 오묘한 진리를 표현하는 일체의 비유법을 의미한다.


여덟째, 본사本事이니, 모든 불제자가 과거세過去世에 맺은 인연이다.


아홉째, 본생(本生)으로 석가여래 스스로가 과거 전세(前世)에 있어서 행한 수도 생활의 얘기를 기록한 것이다.
열 번째, 방광方廣으로 경 가운데 설명된 방정광대方正廣大한 진리를 가르친 것이다.

 

열한 번째, 미증유未曾有로 불가사의한 것이다. 
화엄경, 華嚴經이나 유마경,維摩經에 나오는 세존의 신통력과 도술을 뜻한다..


열두 번째, 논의論議이니 교리를 문답식으로 의논해서 밝혀내는 것이다.
소위 팔만대장경은 이상에서 언급한 십이분을 종합한 것이다. 그 가운데 문학의 범주에 넣을 수 있는 것은 장행, 중송, 고기, 연기, 비유, 본사, 본행 등이라 하겠다.

 

 

비유로 본 불교문학 원래 


원래 불교는 무명무상無名無相한 심령체心靈體를 밝히려는 것으로서 모든 설교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비유가 아니면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 많다. 심령은 단적으로 나타낼 수가 없다.

 

그러므로 마음이란 이름도 없고 형상形相도 없는 것이지만 높기로는 하늘보다 더 높고, 밝기로는 日月보다 더 밝고, 깊기로는 바다보다 더 깊고, 넓기로는 허공 虛空보다 더 넓고, 맑기로는 빙설 氷雪보다 더 맑고, 두껍기는 지구보다 더 두껍고, 단단하기는 반석보다 더 견고하고, 부드럽기는 물보다 더 연하고, 빠르기는 바람보다 더 빠르고, 수명이 길기로는 천지가 생겨나기 전부터 언제까지 이어지는지 알 수 없다.

 

그 때문에 심령은 무시무종無始無終이라 하였다. 금강경, 金剛經은 인생살이가 허망함을 이렇게 비유한다.

“일체 만법이 무상하기가 꿈같고, 환幻 같고, 물거품이나 그림자 같고, 이슬과 번개와 같은 것이다.”

 

이 여섯 가지의 비유를 가리켜 육유전장, 六喩全章彰이라 한다. 그러나 불교에서의 비유는 이처럼 단편적인 것보다 구체적인 예화例話를 들면서 비유한 것이 더 많다. 잡비유경, 雜譬喩經, 백비유경, 百譬喩經등이 대표적이다. 

 

이 가운데 한두 가지의 비유를 보자.


옛날 어떤 곳에 거부 한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20세가 넘어서 결혼을 했으나 첫 부인이 싫어서 소박을 주었다. 

 

소박을 주긴 했으나 친정으로 쫓아 보내지는 않고 시댁에서 시부모를 시봉하면서 살도록 했다.

둘째 부인은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또 싫어져 집에 두고 여종처럼 부려 먹었다. 

 

셋째 부인을 얻고는 의처증이 생겨 다락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가두었다.

 

넷째로 얻은 부인은 절세의 가인이라 잠시도 곁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거부는 병이 들었다. 
그 병은 노쇠로 인해 생긴 병이므로 쉽게 고치기가 어려웠다.

용하다는 의사들까지 포기하자 그 거부는 이렇게 생각했다. 

 

사람이 죽은 후에 극락과 지옥으로 간다는데, 극락과 지옥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있다면 자기는 재산을 모으느라고 죄를 많이 지었기 때문에 지옥으로 갈 것이 확실하다. 

 

그렇다면 황천길, 그것도 지옥으로 가는 길을 혼자 가기가 너무 외롭지 않겠는가.

길동무 삼아 데려가려면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넷째 부인이 좋을 것 같다. 

 

그래서 넷째 부인에게 물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모양이니 같이 갈 수 있겠느냐?"
“싫어요. 나는 싫어요. 영감님께서는 연세도 80이 넘으셨고 호강도 할 만큼 하셨으니 원통할 것이야 없겠지만 저는 장래가 만 리 같은 청춘인데 어찌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도 내가 너를 무척 사랑하지 않았느냐?”


그야 젊은 년이 늙은 영감에게 올 때는 귀염받고 사랑받으러 온 것이지, 죽을 때 따라서 죽으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저는 절대로 따라서 죽을 수가 없습니다.”


거부는 하는 수 없이 
셋째, 둘째에게도 같은 부탁을 했으나 모두 거절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평생 돌아보지도 않았던 첫 부인에게 같은 부탁을 했다.


그러자 첫 부인은 “그야 이를 말씀이 있겠습니까? 예로부터 여필종부 女必從夫라 했습니다. 제가 당연히 따라 가야지요. 그곳이 황천이 아니라 더한 곳이라도 저는 영감님을 따를 생각이니 그런 걱정은 하시지 말고 가는 날까지 마음이나 편히 가지십시요.”라고 대답했다.

 

이상은 모두 비유이다. 거부는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을, 넷째 부인은 육체에, 셋째 부인은 금전과 재물에, 둘째 부인은 부모형제와 처자권속에, 첫 부인은 인간의 심령에 비유한 것이다. 

 

우리 인생은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하는 무상한 것이다. 오고 가는 주인공은 심령 즉 마음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금전, 재물, 처자의 종이 되지 말고 마음을 잘 닦는 공부를 하여야만 세세생생世世生生에 성자聖者, 지자 智者가 되어 악취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

 

 

연기로 본 불교문학


연기라는 것은 한 토막 한 토막의 난센스와 같은 문제를 취급하는 것이다. 세상만사가 인연에 의해 모이고 흩어지는 인과율因果律에 따라 지속하여 간다는 수필 같은 것이다.

 

석가세존께서 어느 날 아난이란 제자를 데리고 외출을 하였는데, 세존은 길가에서 어떤 사람의 두개골을 보시고는 말없이 웃으셨다.

 

아난은 “세존께서는 아무 까닭 없이 웃지를 않으시는데 지금은 어찌하여 웃으시는 것입니까?”

“아난아” 저 길가에 놓인 두개골(해골)을 보았느냐?.”
“네, 보았사옵니다.”
“두개골을 흰 실뱀이 감고 있는 것도 보았느냐?”
“네, 보았습니다.”
“그러면 그 실뱀과 두개골의 관계가 어떠했던 것을 알겠느냐?"
“그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저 두개골은 어떤 여자의 두개골이었는데, 그 여자는 살아있을 때 소문난 미인이었다. 


그래서 그 여자는 뛰어난 미모를 이용하여 많은 남자를 미치도록 만들었다. 그 여자는 죽어서도 그 미모에 집착하고 있다. 성자의 눈으로 그 꼴을 보니 어찌 우습지 않겠느냐?”“네, 과연 그렇습니다. “아난은 그 말씀을 듣고서야 감탄하였다.

 

 

본사 본생으로 본 불교문학

 

석가께서는 과거 무량세無量世에 걸쳐 부처가 되기 위하여 수도하였다. 이때 천신天身, 인신人身, 귀신鬼身, 수신獸身으로 나누어 중생을 제도하였다.

 

그런데 삼천대천세계 미진수와 같은 어떤 상황에서도 몸을 희생하여 선행을 닦았다는 것이 불교서 말하는 석가의 본사본생담本事本生談이다. 마치 신화나 동화 같은 요소가 있지만, 불교에서는 이것을 유명한 본연문학 本緣文學으로 본다.

 

옛날 구야성마왕이란 큰 말이 있었다. 그 말은 바다나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많은 사람을 건져주었다.

 

그런데 바다 건너 저편의 섬에는 귀녀 鬼女가 많이 살고 있었다. 귀녀들은 사람들이 많이 탄 배를 자기들이 사는 섬으로 이끌고 갔다. 

 

사람들을 끌고 간 귀녀들은 화원처럼 아름답게 꾸며놓은 섬에서 미녀로 변신하여 술과 음식을 대접하고 성 性의 유희를 즐긴 후에 싫증이 나면 1년이 지난 다음 철침으로 사람의 목구멍을 찔러 피를 빨아 마시고, 살은 뜯어 먹고, 뼈는 버렸다. 

 

구야성마왕은 멀리서 이러한 모습을 보고는 눈물을 흘리면서 불쌍한 사람들을 구하려고 바다 위를 날아가 그 섬에 도착했다. 

 

그리고는 높은 산에 올라가 “누구든지 이 악독한 귀녀들을 피하여 고향으로 가려는 자는 내게로 오라”고 외쳤다. 귀녀들에게 붙들려 피를 빨리고 살을 뜯기던 사람들이 앞다투어 구야성마왕에게 달려왔다.

 

사람들이 모여들자 구야성마왕은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이 이 섬에서 벗어나려고 하면 귀녀들은 너희들과 교접하여 낳은 자녀들을 끌어안고 바라보면서 가지 말라고 애원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러한 유혹을 이겨내지 못한다면 내가 떠난 후에 또다시 저 악귀들에게 붙잡혀 살을 뜯기고 피를 빨릴 것이니 고향으로 가고자 하는 이는 굳은 결심을 해라. 결심이 선 이는 나의 몸에 있는 머리카락, 털, 수염, 갈기, 다리 등을 가리지 말고 붙잡아라. 그러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을 듣고 마왕을 꼭 붙잡은 자들은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귀녀들의 달콤한 유혹을 못이 긴 자들은 결국 귀녀들의 밥이 되었다.

그때의 구야성마왕은 석가여래의 전신 前身이었다. 이러한 것이 불교의 본사본생담인 것이다.

 

이밖에도 일붕은 각종 신문과 잡지에 諸行無常, 因緣論과 輪廻說, 信仰生活의 가치, 현실초탈의 해탈 정신, 善과 惡의 응보, 불교의 우주설과 인공위성, 속박 생활을 벗는 길, 종교와 철학, 자신의 힘으로 살자, 마음의 양식을 주자 등의 주옥같은 글을 썼다. 

 

그중 동아일보에 연재한 불교의 우주설과 인공위성은 과학 문명을 신랄하게 꼬집고, 그 대안으로서 불교의 깨달음을 제시하고 있다. 그 일부를 옮겨보자.

 

“... 불교사상으로서 과학자들의 왈가왈부를 보면 어린아이들의 장난처럼 보일 것이다. 과학자들이 기계문명으로 天界까지 올라간 것은 결국 정신발달의 영향이다….

 

…종교 신자들은 믿음과 修行으로 천국에 가고 과학자들은 로켓 위성으로 천국을 갈 테니 한 곳에 서로 웃고 만날 모양이다. 그러나 신자들은 천국에 가서도 위안을 주는 포교를 할 것이지만 과학자들은 거기에서도 전차를 굴리고 핵무기를 개발하여 전쟁할는지 모른다….

 

…세계는 도의적인 양보의 미덕과 자신의 깨달음에 의한 평화를 갈구한다.…”

 

얼마나 송곳처럼 날카롭고 정확한 지적인가?

일붕의 평화 사상은 이때부터, 아니 法衣를 입던 그 날부터 싹텄던 갓이다. 60년대에 이처럼 앞날을 내다보는 글을 공개적으로 발표한 학자는 매우 드물었다.

 

일붕의 자신감과 과단성이 돋보이는 한 예가 되겠다.

 

글 / 초대법왕 일붕 / 필수자 비서실장 담화총사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