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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쓰촨성의 가는 곳마다 무상선사의 선연한 흔적 앞에 차를 올리다.

법왕청신문 글 / 최석환 본지 편집위원, 차의세계 발행인 | 2019년 봄 무상선사의 자취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2019년 중국 쓰촨성 펑저우 단징산 금화사에 10년 간 방치되었던 무상선사 사리탑이 발견되면서 무상선사가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간 무상선사를 잊고 있다가 2001년 가을 중국 오백나한의 최초의 발견자인 한국 <차의세계> 최석환 발행인에 의해 무상선사의 사리탑이 발견된 이후 펑저우 민종국이 무상선사의 사리탑의 주요성을 인식하고 원형대로 복원했다.  

 

 

중국땅에서 일어나는 무상선사 신드롬

 

3개월 전 쓰촨(四川)의 펑저우(彭州)에서 일대사건이 벌어졌다. 까닭은 천년 전 신라의 무상(無相)선사가 촉(蜀)땅인 검남(劍南)으로 들어갈 때 신라에서 가져간 모란꽃(牡丹花)을 가지고 들어가 단징산(丹景山)에 심게 되어 단징산이 목단(중국에서는 모란을 목단으로 불린다)의 중요한 발원지가 되어 주목을 끌게 되었다. 해마다 단징산에서 목단문화절을 개최하여 목단의 중요성을 널리 알렸다. 지난해 단징산에서 39회번째 목단문화절을 맞아 주목을 끌고 있다.


게다가 2019년 3월 10년째 훼손되었던 신라왕자 무상선사의 사리탑이 발견되어 중요성을 깨우자 펑저우시 민종국이 원형대로 복원했다. 지금까지 펑저우에서는 무상선사가 김두타(金頭陀)로 알려졌는데 그동안 김두타를 무상으로 연결하려는 시도조차 없었다는 점이다. 펑저우 사람들은 김두타를 중요하게 여겼다. 까닭은 무상선사가 신라의 모란을 펑저우에 전승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그간 무상선사를 잊고 있다가 오백나한중 455번째 조사에 오른 무상선사를 밝혀낸 20년만에 무상선사의 사리탑의 발견으로 당대 신라의 무상선사가 검남에서 상당한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내는 쾌거를 이루었다.   

 

 

지난해 12월 16일 펑저우 단징산 무상선사 사리탑 앞에서 한.중 대표단 30인이 헌다의식을 거행한 이후 16-17일 양일간 제24차 선차아회가 펑저우 호텔에서 성대하게 폐막되었다. 펑저우에서 무상선사를 현창하는 선차아회는 이번이 처음으로 열렸다. 참가자들은 매우 기뻐하며 무상(無相)선사 현창에 나섰다. 촉(蜀)나라로 불렸던 검남은 예로부터 옥야천리(沃野千里)로 일컬어졌던 광활한 분지였다. 이 넓은 분지를 주목했던 인물은 신라 성덕왕의 세 번째 왕자인 신라의 무상선사였다. 무상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촉땅으로 들어가 정중종(淨衆宗)을 열였다.


그런데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무상선사는 잊혀져갔다. 그러다가 필자의 끈질긴 노력으로 2001년 무상선사가 중국 오백나한 중 455번째 조사에 오른 사실이 밝혀지면서 세상에 드러났다. 그 이전에는 무상은 희미한 불빛과 같은 존재였다. 무상선사가 오백나한에 오른 사실이 밝혀지기 이전 2000년대 초반 쓰촨성의 청두(成都), 자중(資中), 시방현(十方縣), 삼태현(三台縣)등 쓰촨 곳곳을 찾아갔을 때 무상의 존재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다가 무상이 오백나한에 오른 사실이 밝혀지면서 세상에 다시 드러났다. 선차아회가 폐막된 이후 참가단들은 쓰촨 곳곳의 무상선사 자취를 찾아 순례에 나섰다.

 

 

왜 이제야 왔는가

 

지난해 12월 17일 펑저우(彭州)에서 제24차 세계선차아회를 폐막한 뒤 중국 대표단이 호텔 앞에까지 나와 2024년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고 아쉬운 작별을 남기고 펑저우를 떠나 바오산으로 갔다. 우리가 바오산(寶山)을 찾아간 까닭은 신라의 무상선사가 바오산의 차를 마시며 수행을 찾기 때문에 바오산은 매우 중요한 곳이다. 먼저 바오산차박물관(寶山茶博物館)에 들러 쉬스홍(徐世洪)선생을 만나 바오산의 고차산으로 찾아갔다. 쓰촨의 차를 말할 때 몽정산의 감로차를 말하고 있지만 무상선사가 주목한 보산의 차아(茶芽)를 주목했다. 육우(陸羽)의 <다경(茶經)>에도 젠난(劍南, 쓰촨의 옛이름)에서 최상등의 차가 펑저우에서 생산된다고 말했듯이 사람들은 젠난의 차산을 알지 못한다.

 

육우는 《다경》에서 특히 펑저우 차를 칭찬했다. “젠난에서 펑저우는 상(上), 몐저우(綿州), 수저우(蜀州)는 다음, 챵저우(邛州)는 그 다음, 아저우(雅州), 후저우(滬州)는 그 다음, 메이저우(眉州), 한저우(漢州)는 하(下)이다.” 차성 육우에게 펑저우차를 1등으로 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주석에도 “구롱현(九隴縣) 마안산(馬鞍山) 지덕사(至德寺)와 펑커우(棚口)에서 난 것은 샹저우(襄州)와 같다”고 하였다. 바오산의 고차산을 찾아가 눈속을 뚫고 올라온 차나무를 발견하고 매우 놀라워 했다. 무상선사는 이처럼 뛰어난 명차를 마시며 선차지법을 실천했다.


바오산에서 시방현으로 가려면 2시간 거리였다. 순례단은 서둘렀다. 다음 코스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오산에서 시방현에 이르니 나한사(羅漢寺)가 반겼다. 바로 이곳이 마조도일선사의 고향일뿐만 아니라 마조의 출가지이기도 했다. 나한사의 산문을 거쳐 오백나한 당에 이르렀다. 오백나한을 모시고 있는 나한사의 오백나한을 살피다가 455번째 조사에 이르렀을 때 무상선사가 미소지으며 반겼다.

 

 

그 순간이었다. “왜 이제야 왔느냐?”고 울림의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무상공 존자께서 오른손을 튕기며 자비의 미소를 머금고 바라다보았다. 멀리 한국에서 건너온 세계홍차연구소의 이강자 연구원이 백자 위로 차를 우려낸 뒤 무상공 존자에게 차를 올렸다. 그때였다. 차를 공양하자 무상공 존자가 미소 지으며 반겼다. 이처럼 뒤늦게나마 무상공 존자의 후학들이 멀리 고국에서 쓰촨으로 건너와 차를 공양하게 된 것은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2001년 오백나한 중 455번째 조사에 오른 신라의 무상선사가 발견되기 이전까지만 해도 무상공존자를 까맣게 잊고 있다가 필자가 무상선사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무상공존자가 신라의 무상선사로 규명되면서 무상은 비로소 깨어났다.

 

한국에서 건너온 후학들은 앞을 다투어 무상공 존자에게 차공의식을 올렸다. 이렇게 무상선사가 ‘왜 이제야 왔느냐?’는 메아리 소리가 ‘어서 오게나?’라는 메아리 소리로 들려왔다. 무상선사에게 차를 올린 뒤 오백나한당을 살피다가 신라의 또 다른 선사인 479번째 조사에 오른 오진상(吳眞常) 존자가 반겼다. 살며시 옆을 바라보는 오진상 존자는 나한의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이처럼 당시 신라인의 숨결이 검남에서 영향을 끼치고 있었음이 실감나게 했다. 나한사를 빠져나와 무상선사가 처적(處寂)선사를 의지하여 수행했던 자중의 영국사(寧國寺)를 찾아갔다. 
 


검남(劍南)의 가는 곳마다 무상의 흔적들

 

시방현 나한사에서 자중현의 영국사(寧國寺) 산문에 이르렀을 때 오른쪽 산문에 ‘범목가사전사 신라삼태자(梵木袈裟傳嗣 新羅三太子)’라는 대련이 산문 입구에 켜다랗게 새겨져있다. 이 말은 신라의 세 번째 왕자에게 달마의 가사가 전승되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쓰촨의 무상선사 흔적을 찾아온 한국인들은 충격을 받은 듯 했다. 한국에서 알려지지 않았던 무상선사가 타국에서 존경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웠다.  


필자가 2000년대 초반 영국사(寧國寺)를 찾아왔을 때 페허로 된 영국사를 보고 참담했다. 당시 영국사에는 목면가사는 물론 산문에 신라의 세 번째 왕자라는 흔적조차 없었다. 이같은 변화는 2000년대 초반 오백나한에 오른 무상선사가 발견된 이후에 무상선사의 현창이 시작되었음을 살필 수 있다. 영국사가 목면가사의 소장처로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측천무후를 통해 달마의 가사가 지선선사가 측천무후로부터 받아 영국사에 전승되어 왔는데 지선은 처적에게 처적은 무상선사에게 가사가 전승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영국사 산문을 지나 법당에 이르니 장경각 주련 옆에 목면가사 편액이 드러났다.

 

목면은 바로 달마로부터 내려온 가사의 최후의 소장처가 영국사라는 의미이다. 보리도량(菩提道場) 법당에 들어서니 지선, 처적, 무상 등 삼대화상을 본존불로 모셨다. 그중 맨 왼쪽면에 신라 왕자인 무상선사를 본존불로 모신 것을 보고 한국인으로서 감동을 받았다. 삼대화상 앞에 합장한 이후 어하굴로 찾아갔다. 어하굴을 찾아간 까닭은 무상선사가 어하굴에서 깨달음을 이룬 뒤 정중종을 탄생한 역사적 성지이다. 영국사에서 어하굴까지는 강변을 따라가야 했다.


물결을 따라 어하굴을 찾아갔는데 앞을 분간할 수 없었다. 다시 강변을 빠져나와 어하굴(御河窟)을 찾아갔다. 예전에 왔던 천곡산이 펼쳐졌다. 강변의 우측에 무상선사가 수행했던 천곡산 바위굴과 맞닥뜨렸다. 먼저 어하굴 입구에 무상선사를 모신 영당 앞에서 한국에서 가져간 말차로 세계홍차연구소의 이미나 연구원이 무상선사를 모신 영당 앞에 헌다의식이 거행되었다. 신라의 무상선사가 천곡산 바위굴에서 깨달음을 이루었던 역사적 현장에서 신라의 후예들이 차를 공양하게 된 것은 의미가 깊다고 말할 수 있겠다.    

 

 

무상선사가 수행했던 어하굴의 무상선사 영당앞에 차를 올리다

 

천곡산을 어하구(御河溝)라고 부르는데, 어하구의 길이는 500여미터로 계곡과 숲이 우거져 음산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무상 선사가 수행했던 동굴을 찾았다가 깜짝 놀랐다. 동굴 안은 물줄기가 휘몰아쳐 온통 물속에 잠겨 버렸다. 불상들조차 물속에 잠겨 그 형상을 분간할 수 없었다. 그중 얼굴만 내밀고 있는 불상에서부터 여러 가지 형상을 한 모습들이 간간이 눈에 띄었다. 암벽에는 물이 흘러내려 불상들에 이끼가 끼었다. 무상선사 동굴을 살피고 빠져나올 때 쯤 대자사 방장스님이 필자를 반기며 사진을 찍었다. 한국과 중국의 무상 연구가들의 두 손을 맞잡은 이와 같은 정경은 뒷날 무상 연구에 한 페이지를 장식할 것 같다. 뒤에 바위 암벽에 ‘천곡산’이라고 새겨진 암벽글과 무상선사 조상이 있다. 

 

《역대법보기(曆代法寶記)》에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내가 천곡산에 있었을 때에는 염불을 하지 않았다. 동료 수도자들은 모두 나한테 화를 내고, 함께들 산을 떠나 버려서, 누구 한 사람 양식을 날라다 주는 이도 없었다. 그래도 흙을 빚어 끼니로 때우면서까지, 산을 떠날 틈도 없이 오직 고요히 앉아만 있을 따름이었다. 맹사주(孟寺主)는 내가 고요히 앉아만 있다는 말을 여러 사람에게서 듣고 곧 당화상에게 고자질했다. 당화상은 그 말을 듣고 더욱 기뻐했다. 나도 천곡산에 있었기 때문에 고자질 이야기도 몰랐는데, 다만 당화상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소식을 듣고, 천곡산을 떠나 자주 덕순사로 찾아간 일이 있었다. 맹사주는 내가 오는 것을 보고도 절에 들지 못하게 했다. 당화상은 내가 왔다는 말을 듣고는 나를 방 앞으로 불러들였다. 내가 미처 절이 끝나기도 전에 당화상은 다짜고짜 물었다. ‘그대는 천곡산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었던가?’ 나는 대답했다. ‘아무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멍하게 앉아있었을 따름입니다.’ 당화상은 다시 말했다. ‘그대는 그곳에서 멍하고, 나는 이곳에서 멍하고.’ 당화상은 아는 내용이지만은 대중들은 무엇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말이었다.”

 

당화상은 산중에서 김화상이 멀리 자기를 생각하는 것을 알고, 곧바로 그 마음을 읽었다. 


간간히 천곡산에 얽힌 무상 선사와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오는데 필자는 천곡산에 무상 선사가 수행했던 동굴이 물속에 잠긴 정경을 바라보면서 너무나 오랜 세월이 흘렀음을 실감했다. 


무상선사는 험난한 고행 끝에 마침내 깨달음을 이루고 정중종을 탄생시켰다. 천곡산 바위굴은 무상선사가 정중종을 탄생시킨 역사적 현장인데도 그간 잊고 있다가 자중현 정부가 무상선사의 영당을 조성하고 어하구를 성지로 가꾸었다. 그 같은 모습을 지켜보고 한국인으로서 진한 감동을 느끼게 했다.

 

 

무상선사가 중창한 대성자사

 

쓰촨성의 가는 곳마다 무상선사의 체취를 느끼며 한국인으로서 타국에서 진한 감동을 느꼈다. 쓰촨의 청두의 마지막 코스로 대자사를 찾아갔다. 대자사는 당 현종이 칙명으로 무상선사를 주지로 천거했던 곳이다. 


“현종이 청두에 머무는 동안 대자사의 영간(英干) 스님이 거리에서 생활이 어려운 백성들에게 음식을 나눠 주면서 국운을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래서 영간 스님에게 ‘대성자사(大聖慈寺)’라는 편액을 내리고 밭 1,000무(畝)를 하사하였다는 것이다. 그 이듬해 현종이 대자사를 재건하고 무상선사를 주지로 임명한다는 칙명을 내리게 된다. 그리하여 무상은 96동과 854칸 규모로 대자사를 일으켜 세우게 되었다.”

 

 

역사적 성지인 대자사는 오랜 세월이 흐른뒤 노천다관으로 사용하다가 2000년 초반 무상선사가 중국 오백나한 중 455번째 조사에 오른 사실이 밝혀지면서 무상 현창이 시작되었다. 2004년 조사당이 건립되고 무상선사의 영정을 모시고 무상선사 현창의 중심에 서 있던 대자사는 현장법사 현창이 시작되면서 훼손되었다. 송대 일본에 영향을 끼친 도육존자를 내세우면서 혼란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2019년 코로나 이전 한국의 순례객들이 무상선사의 비석이 대자사 경내에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대자사를 찾아가 소동을 벌인 경우도 있다.


무상선사를 흠모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대사자는 무상선사 현창에 나서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대자사를 거쳐간 현장(玄奘)법사 나 송대의 도육(道育)존자 현창보다 대자사를 중창한 무상선사의 현창이 대자사의 가장 큰 과제라고 생각했다. 선차지법을 창안한 무상선사의 선차의 도가 바다를 건너 세계로 퍼져나가고 있다.  

 

 당나라 시대 검남(劍南)지역에서 정중종을 일으킨 무상선사는 쓰촨의 가는 곳마다 무상선사의 자취을 발견하고 진한 감동을 느꼈다. 펑저우의 단징산에서 무상선사 사리탑앞에서 헌다를 시작으로 시방현 나한사와 자중현의 영국사와 천곡산 어하굴, 청두의 대자사 등을 순례하면서 무상선사의 다향이 바다를 건너 천년 후에도 동류(東流)의 물결로 이어져갔음을 실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