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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새가 날은 까닭은 3

오! 한국의 달마여 지난 줄거리를 설명한 다음 이어짐 3

법왕청신문 이존영 기자 | 오! 한국의 달마여 지난 줄거리 2~3 이어짐

 

그러나 그 어떤 경우에도 부처님의 말씀과 佛法의 正道를 이탈하지 않아야 한다.'

 

이 같은 다짐과 각오를 스스로 다지는 사이 비행기는 고도를 낮추고 이륙 준비에 돌입했다. 머나먼 여행을 마치고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것이다.

 

 

 

샌프란시스코에 머물며 컬럼비아대학 교환교수로 일하던 일붕은 미국에 한국의 불교를 심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끝에 첫 제자로 네빌 워크 박사 학위를 받아 1964년 10월 4일 머리를 깎고 道明이란 법명을 내렸다. 20년간 천주교 신부로 있던 네빌 워크 박사가 일붕의 제자가 되자 뭇셀씨도 뒤를 따랐고 현지의 매스컴은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1965년 3월 24일, 일붕은 도심(道心)이란 법명을

 

얻은 제자 완델씨의 주선으로 컬럼비아대학에서 캘리포니아대학 동양학과 교수로 옮겨 강의와 포교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 결과 法仁(유진 와그너), 法心(막스), 道香(호르비츠), 道聖(루이스) 등의 유능한 제자를 얻게 된다. 이들은 후에 한국불교를 미국에 포교하는 선봉장 임무를 수행했다.' 그중 루이스의 제자들은 일붕이 루이스에게 내린 주장자의 소유권과 법맥(法脈)을 다투다 캘리포니아주 연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했을 정도로 일붕을 절대적으로 모셨다. 6개월 후 워싱턴대학으로 자리를 옮긴 일붕은 다시 龍正(라셀 윌리암), 聖龍(자크 헌), 마샬거사 등의 제자를 맞아들였다. 이들 역시 현지 포교의 첨병으로 맹활약한다. 聖龍은 혜능선원의 신정덕 스님이 학업으로 부재중일 때 주지 대리를 맡았을 만큼 신심과 실력이 뛰어난 제자였다.

 

일붕이 단기간에 이처럼 학력이 높은 지식인과 사회 지도급 인사들을 속속 한국불교 승려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은 해박한 지식과 禪의 실천력을 겸비했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미국에 진출한 일본, 자유중국, 스리랑카, 태국, 미얀마, 티벳, 몽고 등의 승려들은 수행력은 있었지만 현대적인 사고와 지식이 뒤떨어졌고 일본 불교계의 거두 스즈끼 다이세쯔 같은 학자는 이론은 뛰어났지만, 수행능력이 높지 않았다. 그러나 일붕은 동남아와 유럽의 각 대학에서 갈고 닦은 강의 실력과 언제 어디서고 참선을 지도하고 시범을 보일 수 있는 수행력이 겸비되었기 때문에 큰 호응을 얻은 것이다. 

 

워싱턴대학 시절에는 불교를 서구인에게 학문적으로 이해시키기 위해 <영혼과 마음>, <불교 철학의 4중 세계관> 등을 발표하여 대승불교와 선의 골격을 논리정연하게 전개했다.

 

이런 글을 읽은 펜실베이니아대학 심리학과장 마스탕카 박사는 일붕에게 ‘동양의 석학'이란 칭호를 부여했다. 1966년 1월 말, 일붕은 하와이대학 교환교수가 되어 그동안 외국인에게 짓눌려 살아온 교포들의 사기를 올리는데 크게 이바지한다. 

 

일붕의 육성이 방송을 타고 나가자 기쁨에 넘쳐 울음을 터뜨리는 교포까지 있었다. 일붕은 하와이 전역을 돌며 불교의 三學思想과 한국불교의 전통, 왜 불교를 배우느냐는 주제의 강연을 했다]. 일붕의 강의에 감명을 받은 하와이대학 아시아 연구과장 앤더슨 박사와 피츠 교수는 7월 15일 학생들을 이끌고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한 학기의 강의를 끝내고 템플대학으로 떠나기 직전에 가진 고별 강연에서 일붕은 선을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해 더욱 유명해졌다.

 

…맑은 물을 손안에 잡아라. 그러면 달이 손안에 잡힐 것이요, 향기로운 꽃을 잡으면 향기가 내 온몸에 스밀 것이다 …네가 곧 부처니라…”

 

 

템플대학에서는 11개 단과대학과 대학원에서 3개의 강좌를 맡았다. 강의가 없는 날에는 필라델피아 선원에서 좌선과 경전을 지도하는 바쁜 나날을 보냈다. 일붕의 이러한 활동을 지켜본 조선일보는 1967년 1월 12일자 신문에서 일붕을 한국을 대표하는 해외 인물로 선정했다. 불법을 전하는 포교를 ‘민족의 얼’로 평가한 것이다.

 

하루는 일붕에게 선을 배우던 가톨릭의 신부가 찾아와 禪의 이론에 관한 대화를 나누고 싶다고 했다. 일붕은 흔쾌히 수락하고 대화에 들어갔다. 잔뜩 준비해온 듯 신부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禪 공부는 무엇 때문에 합니까?”

 

“무심삼매(無心三昧)에 들어가기 위해서 합니다."“사람이 무심히 되면 흙, 나무, 돌처럼 무생물이 되는 것이 아닙니까?”

 

“성경을 보면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어린아이는 천당 문으로 들어가기 쉽지만, 사물을 판단하고 세상을 잘 아는 어른들은 욕심을 지녔기 때문에 천당엘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선의 진리를 잘 알았습니다."

 

이번엔 일붕이 되물었다.

 

 

“무엇을 잘 알았단 말씀입니까?”

 

 

“나는 철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머리가 잘 돌아가 한 번 들으면 아는 재간이 있지요."

 

그러더니 다시 일붕에게 물었다.

 

“아니, 그렇다면 어떻게 아는 것이 잘 아는 그것으로 생각하십니까?"

 

“배로 알아야 제대로 아는 것입니다.”

 

“예!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뭐라고요! 배로 안다고요? 배로 어떻게 압니까? 배가 무슨 감각이 있고 지적 능력이 있습니까?"

 

“감각으로 않다는 것은 모르는 것입니다.”

 

“그럼 두뇌로 생각하는 감각을 떠나서 어떻게 사물을 판단하게 됩니까?”

 

“그건 말장난이나 이론을 떠나서 철저히 실행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사물에 대해서도 귀로 만들어 느껴 아는 것이 있고 피부로 심각하게 느껴서 깨달아 아는 것이 있습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배가 무엇을 알 수 있을까요?"

 

“자세를 바로 하여 가부좌를 하고 앉아서 크게 숨을 쉬고 기운을 아랫배의 단전에 모아 넣고 우주와 내가 둘이 아니고 자연과 내가 결코 둘이 아닌 경지에 이르고 보면 이 세상에 유형무형 또는 천태만상으로 존재하는 것이 모두 나의 뱃속에 들어와서 능히 소화되어야만 부처도 제대로 알고 철학의 생명인 진리란 본체를 제대로 깨쳐 비로소 알게 되는 것입니다.”

 

주의 깊게 듣던 신부는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더니 개종(宗)을 심각하게 고려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조용히 떠났다.

일붕이 제자들과 힘을 합쳐 포교에 전력투구하여 ‘일붕 붐’을 곳곳에서 일으키자 천주교 신부 네팩박사가 찾아와 양 종교 간의 벽을 허물고 친선을 도모하자는 제의를 했다. 일붕과 네팩 신부는 성당과 선원을 번갈아 방문하면서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는 사이로 발전했다. 종교심리학회를 이끌던 프레드릭 박사도 일붕의 학문적인 성과를 치하하면서 법률가 집단의 모임에 자주 초청하였다.

 

1968년,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를 습격하고 촉망받던 케네디가 암살된 해다. 일붕은 이해 8월 초 버지니아주 알렉산드리아市의 한 공증인의 서명이 첨부된 한 통의 기증서를 받았다. 

 

휘셔씨 일가가 버지니아주 블랙버그市 근처에 있는 수프 더스틴 山에 있는 90에이커(약 11만 평)의 땅을 일붕에게 시주한다는 기증서였다. 일붕은 그야말로 ‘마음이 통하니 하늘이 열리는' 환희의 기쁨을 느꼈다. 이 시 주에 이어 휘셔씨의 친구 헨리씨도 덩달아 90에이커의 땅을 또 시주했다. 미국에 들어온 지 백 년이 다 된 일본불교에서도 없던 일이었다.

 

일붕은 이 22만 평의 땅에 아메리카는 물론 전 세계에 한국불교를 알리고 키우는 전진기지로 삼고자 世界 中央 禪院(World Zen Center)을 세운다. 이해에 일붕은 선가귀감 보조국사 법어 진심 직설, 眞心直說, 수심결,修心訣, 정혜결사문, 定慧結社文, 원돈성불론, 圓頓成佛論, 등을 영문으로 옮겼고 나옹대사, 진각대사, 태고국사 법어 등도 번역 출간했다.

 

1969년 1월 24일

일붕은 템플대학에서 조당집을 통한 한국 선불교 연구라는 논문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한국 승려 최초로 미국에서 박사를 딴 것이다. 일붕은 이 논문에서 한반도에 불교가 전래 된 경로와 그 경위, 한국 선불교의 특색과 인맥, 독특한 선불교의 창출 의미 등을 상세히 서술했다.

 

이 논문은 발표된 즉시 전 세계 불교학자들의 관심을 집중시켰으며, 약 1년 후 월낫트크리크市의  조계종 선원판으로 엮어지자 불티나게 팔렸음은 물론 한국불교의 인식을 완전히 바꾼 공헌을 남겼다.

 

이 논문이 한국의 불교사에서 기념비적인 위치를 차지한 것은 그때까지 서구인들이 한국불교는 중국이나 일본불교의 아류亞流라고 여겨온 관념을 깨끗하게 씻었다는 점과 그로 인해 한국 불교가 갖는진 면목을 제대로 전달했다는 두 가지 측면의 이유에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