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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새가 날은 까닭은 2

오! 한국의 달마여 지난 줄거리를 설명한 다음 이어짐 2

법왕청신문 이존영 기자 | 오! 한국의 달마여 지난 줄거리 1~2 이어짐

 

이날 이천 서씨 댁의 장손이 귀중한 生을 받아 태초의 일성一聲을 울리면서 ‘중생의 빛’이 되고자 태어났다. 갓 태어난 아이는 모친 이씨 부인의 태몽과 조부의 꿈을 뒷받침이나 하듯 피부가 유난히 희고, 이목이 수려하고, 골격이 단단하게 생긴 옥동자였다. 이천 서씨 집안에는 밀동자 같은 장손을 얻은 기쁨에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산모도 건강했고 갓난아이도 탈 없이 건강해 그 기쁨은 더욱 컸다.

 

 

아무리 붙잡아도 안 된다고 여긴 가족들의 출가 허락을 얻을 때는 날아갈 것 같은 기쁨을 얻었지만, 막상 떠나려 하니 세속의 정이 사무쳐 몇 번이고 마음을 다져야 했다. 질기고 질긴 것이 인연이란 사실을 새삼 느꼈다. 그때의 상황과 일붕의 심정을 되살려 본다….

 

마침내 출가를 허락받았다는 기쁨에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일붕은 다음날 일찍 길 떠날 준비를 마쳤다.

 

조부님과 부모님께 떠나기 전 세속인世俗人으로서의 마지막 큰절했다. 어머니와 아내가 멀리까지 따라왔다. 길모퉁이를 돌아서자 어머니는 치맛자락을 들치더니 비상금으로 감추어 놓았던 돈을 “배고플 때 먹을 것을 사 먹어라" 하시면서 주었다.

 

체면을 차리느라고 눈물을 참고 참았던 아내는 설움이 일시에 복받쳐 오르는 듯 오열을 시작했다. 눈만 껌벅거리던 송묵도 제 엄마를 따라 울음을 터뜨렸다.

 

며느리와 손자가 하도 서럽게 울어대자 일붕의 어머니도 울음보따리를 풀고 말았다.

 

일붕은 어머니가 울고, 아내가 울고, 자식이 우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자신마저 눈가에 눈물이 고이는 것을 느끼고 급히 고개를 돌려 눈물을 감추었다. 하늘을 쳐다보았다. 맑았다.

 

마음속으로는 ‘울지 마시오. 울어서 될 일이 아니오'를 반복했지만 하도 서럽게 우는 모습을 보니 자신도 눈물이 글썽거렸다.

 

정말 슬프므로 우는 것이 아니라 울기 때문에 슬픈 것인지도 모른다….

 

눈물바다는 쉽게 거두어질 기미를 안 보였다. 이럴 때 말이 필요 없다는 것을 이미 경험한 일붕은 그저 가만히 있었다.

 

시간이 흘렀다.

 

울기도 힘든 것이다. 울다가 지친 내색이 보이자 일붕은 조용히 다가갔다.

 

“어려운 일인 줄 알지만, 기왕 떠나는 사람이니 가볍게 떠나도록 도와주십시오. 부탁입니다.”

 

어머니도 아내도 어깨까지 들썩거리던 울음을 삼키려 노력했다.

 

눈빛이 마주쳤다.

어머니는 눈으로 말했다.

‘부디 건강히 잘 보내라.’

아내도 눈으로 뜻을 전달했다.

 

‘이 무정한 사람아, 부처가 뭐라고 핏덩이 같은 자식과 갓 피어난 꽃 같은 아내를 두고 간단 말이오. 어쨌든 잘 되시오.’

 

일붕은 눈인사를 나누고 발걸음을 옮겼다. 천 근같이 무거운 발걸음이었다. 순간 '무엇을 위한 출가인가'하는 의문이 생겨 '모든 것을 팽개치고 돌아설까’하는 마음도 일어났다.

 

몇 걸음 더 옮겼다. 뒤돌아보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내가 달려와 손을 붙잡을 것 같았다. 재롱을 부리던 아들 녀석이 눈에 선했다. 그 부드러운 볼, 고사리 같은 손, 태초의 정기를 간직한 맑은 눈, 방실방실 웃던 얼굴・・・'약해지면 안 된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가.

 

약해지지 말자.

 

더 멀어지도록 빨리 걷자.

 

자신을 끝없이 추스르며 모퉁이를 돌고 돌아 마을이 보일락 말락 한 곳에 이르러서 뒤를 돌아보았다.

 

어머니도, 아내도, 송묵이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점이 있었다. 집도 바위도 나무도 사람도 하나의 점일 뿐이었다. 점은 곧 없어져 무無로 화化했다. 인간적인 괴로움도 번뇌도 차츰 사그라지었다.

 

걸음을 재촉했다.

 

 

일붕은 19세에 산방굴사 강혜월 스님으로부터 계를 받고 회암悔巖이란 법명을 받았다. 법정사와 산방굴사를 오가며 예불과 예식을 익히며 불경을 공부하다 1년 후 제주를 떠나 더 넓은 세계로 나가려고 속가에 들러 여비를 마련했다. 이때 또 한 번 애별이고愛別離苦의 고통을 맛보았다.

 

지리산 화엄사의 진진응 대강백을 스승으로 모시려 목선을 타고 떠났다. 도중에 풍랑을 만나 죽을 고비를 맞이했으나 기지를 발휘하여 모두를 살리고 거지꼴로 화엄사에 도착한다. 화엄사에서 공양주, 채공, 부목 등을 하면서 행자 생활을 다시 겪다가 사집과 사교를 건너뛰어 화엄경의 교학에 입문했다.


일붕


1935년 가을, 법랍 4세, 세수 22세가 되던 해 진진응 대강백의 수제자를 따라 전북 완주군 위봉사로 갔다가 주지 유춘담 스님의 제자가 된다. 유춘담 스님은 일붕이란 호를 내리고 애제자로 삼았다. 그러나 주로 송광사에서 열던 강원이 재정난으로 문을 닫자 춘담 스님의 소개로 서울 동대문 <개운사 대원암>에 계시던 박한영 대강백의 제자가 된다.

 

박한영 대강백은 노재봉, 진진응 스님과 함께 불교계의 3 천재로 불리던 분이라 학인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이곳에서 일붕은 4년여를 머무르며 사교과와 대교과를 마쳤다. 박한영 스님은 일붕을 특히 아껴 불교뿐만 아니라 동양학의 전반적인 지식을 전수하여 주었고 자신의 필사본 사기私記까지 물려주었는데, 일붕은 이때 만해 한용운, 춘원 이광수, 육당 최남선 같은 당대의 거물들을 만났다.

 

박한영 스님은 불교전문학교(동국대 전신) 교장을 지낸 분이라 발이 넓었다. 일붕의 학문이 경지에 오르자 그분은 강원도 오대산 월정사 강원의 강사가 되도록 주선했다. 일붕은 포광 김영수스님이 계시던 전북 김제 금산사로 내려가 6개월간 식수 행상을 공부하고 월정사로 향했다.

 

문수도량 오대산 월정사에서 일붕은 상원암의 선원을 이끌고 계시던 방한암 스님을 만나 禪에 관한 지도를 받는 한편 20대 후반의 나이에 강원의 강사가 된 일붕이 나아갈 길을 제시해 주었다.

 

어느 날 세속의 부인 이씨가 찾아왔으나 차갑게 대해서 돌려보냈다. 부인으로부터 어머님의 별세 소식을 들은 일붕은 혼절할 정도로 놀랐으나 곧 정신을 차려 백일 간의 지장기도를 정성껏 드렸다.

 

일붕은 월정사 시절 지극한 기도를 올려 문수동자를 두 번이나 친견하는 즐거움을 얻었다. 일붕의 명성이 알려지기 시작할 무렵 포교왕 김태흡스님이 해외 유학을 권했다. 항상 신학문에 대해 갈망을 하던 일붕은 이종욱 주지스님의 협조로 일본 경도 임제종 <묘심사> 경내에 있는 임제대학전문부에 유학한다. 

 

일본의 패망과 함께 귀국한 일붕은 종로구 창신동 안양암 포교사로 있으면서 동국대학을 마친다. 동국대를 졸업한 후에는 전북대, 원광대, 항공대, 국학대, 부산대, 해인대, 동아대 등의 대학 강단에 섰다. 또한, 해동고 교장과 경남일보 논설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58년에는 아세아재단의 지원으로 제5차 방콕세계불교도대회 한국 측 대표로 하동산 종정, 이청담 총무 스님 등과 참석했다. 대회가 끝나고 동아대 철학과 주임교수로 재직 중일 때 미얀마 상가대학 교환교수로 초청을 받았다. 상가대 교환교수직을 마치고 나서는 인도 성지순례를 거쳐 독일 함부르크대, 영국 런던대, 스리랑카 Vidyodaya대 등에서 교수를 맡았다.

 

1962년 5월 25일에는 귀국길에 대만 삼장학원 백성법사로부터 불교계 최고의 영예인 삼장법사 인가를 받고 박사학위까지 취득했다.

 

다시 한국에 온 일붕은 불국사 주지와 동국대교수를 겸임하여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미국 컬럼비아대로부터 교환교수로 초빙한다는 초청장이 날아왔다.

 

일붕을 아끼던 불교계 인사들이 장기간의 외국생활이 국내 기반을 무너뜨린다며 미국행을 재고하라고 권하자 “허-허, 답답하고 안타까운 지고, 천지가 내 집이고 인류가 한 식구거늘 어찌 그리 옹졸한 생각에 젖어들 있소이까” 하면서 바랑을 꾸렸다.

 

1964년 8월 29일.

세속의 나이로는 51세, 법랍 33세가 되던 해, 갑진년 음력 칠월 스무이튿날, 일붕은 마침내 미국으로 향하는 영국 항공사의 트랩을 올랐다.

 

국내에서는 김종필-오히라의 메모로 비상계엄령이 선포 (6.3사태)되고 석굴암 복원공사 준공식이 있었고 해외에서는 맥아더가 죽고 중공이 원폭실험에 성공한 해였다.

 

일붕은 비행기 안에서 스스로에게 이런 다짐을 했다.

 

'이번의 미국행은 어느 외국행보다 의미가 크다. 이미 세계의 중심이 된 미국에 최초로 입국하는 한국의 승려라는 것도 그렇고 나의 성장을 기약하는 발판이 된다는 점도 그렇다.

 

내가 제대로 뿌리를 내리면 한국의 불교가 세계만방에 퍼져나갈 것이지만, 만약 좌절하거나 행실이 바르지 못해 오점을 남긴다면 한국불교가 망신을 당하게 된다. 늘 이점을 명심하자 나의 잘못이 곧 한국불교의 잘못으로 인식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또한, 나는 삼장법사라는 영예로운 인가를 국제적으로 받은 사람이 아닌가 그렇다! 나는 현대판 삼장법사로서 서유기나, 왕오천축국전의 현장법사와 혜초법사의 활동을 뛰어넘는 승려가 되자.

 

바로 그 길이 내가 꿈꾸던 이상이요, 보람이 아니었던가. 기회는 많지 않다.

 

이제야 비로소 일붕이란 법호에 걸맞은 날갯짓을 시작한 셈이다. 뛰고 또 뛰자. 천하를 한 번의 날갯짓으로 뒤덮는 붕새의 위업을 되살려야 한다….

 

그러려면 용맹정진하되 겸손해야 하며 실력과 적응력을 길러야 한다….

 

 

일붕!

 

이제 시작일 뿐이야. 그동안 갈고닦은 기량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한편 新文物을 익히고 한국불교를 해외에 알리는 선구자란 사실을 자나 깨나 머리에 새겨야 한다….

 

선구자는 항상 고독하고 외로운 법.

 

그러나 그 고독과 외로움을 이겨낸 자만이 시대를 앞서고 미래를 여는 선각자로서의 가치를 인정받는 법,

 

일붕!

 

마음을 단단히 다지게.

 

결심하기에 따라, 마음먹기에 따라, 행동하기에 따라 무한한 명예와 영광과 존경을 한 몸에 받을 수도 있다.


다음호에는 오! 한국의 달마여 지난 줄거리 2~3 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