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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법왕 일붕 서경보 큰스님 전기집 오! 한국의 달마여 20

스님, 이것이 궁금합니다 20

 

법왕청신문 이존영 기자 | 이 글은 일붕 서경보 법왕을 독자들이 쉽게 이해하도록 하기 위하여 당시 법왕청 담화 이존영 비서실장이 각종 신문, 잡지, 회보, 방송 출연 테이프, 저서, 전기 등을 종합적으로 비교 검토하여 비교적 객관적인 입장에서 정리한 것이다.

 

붕은 언제 어디서 출생했으며 몇 세에 어떤 스님께 머리를 깎았습니까?

 

“1914년 10월 10일 제주도 남군 중문 면(현 서귀포시) 도순리 301번지에서 할아버지 서봉진(徐鳳辰)아버지 서성현(徐成賢)의 손자와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조부는 3형제 중 장남이었고 아버지는 3남 5녀의 장손이었습니다. 법왕의 형제자매는 3남 2녀인데 장남입니다.

 

19세에 산방굴사 강혜월 스님을 은사로 하여 불가에 입문했습니다.”
 
3남 5녀 중 장남. 13대 손孫子:승철·승일가계도(圖)제주목사 서상우(徐相虞)祖父 徐鳳辰祖母(古阜李氏)父 徐成賢母 李卯生本人 徐京保出家 前의 妻 李亥生-3형제중 장남⁺ 京保⁻允保-京垓- 3남2녀중 장남孫女:子 徐松默 子婦 한예선-안나 · 지나 · 후나

 

利川徐氏 恭度公派 ※ 出生 : 甲寅年 五月 九日 戌時

 

어린 시절은 어떻게 보냈으며 출가 시 부모님의 반대는 없었습니까?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면서 보냈습니다. 할아버지께서 신학문을 배우면 어린 시절을 대부분 보냈습니다.

 

할아버지께서 신학문을 배우면 ‘일본놈의 종노릇을 한다.'라고 학교에 가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입니다.

 

매우 총명해서 6세에 한문을 깨치고 10세에는<사서삼경> 그것을 통달했으며 15세엔 다니던 서당의 훈장이 되었습니다. 

 

이때 노자의<도덕경>과 장자의<남화경>등을 읽었는데, 특히 삼장법사가 나오는<서유기>에 심취했습니다.

 

다른 어린이와 다른 점은 할아버지께서 잡아 온 고기 중 살아있는 고기를 몰래 살려주고 나무나 꽃을 함부로 꺾지 않았던 점입니다. 성격은 유순했으며 어른들의 뜻을 거스르지 않았습니다. 출가를 전후하여 엄청난 반대가 있었지만 기필코 뜻을 관철했습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어떤 일을 하시는 분이었습니까?

 

“할아버지는 주로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아 생계를 유지하였고, 아버지는 농사일에 종사했습니다.”

 

일붕은 어떤 분들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으셨습니까?

 

“출가하기 전에는 외삼촌 이지화 선생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분은 한학에 있어서 제주 일원의 최고 학자로 평가받는 석학이었습니다. 그분은 조카인 徐 法王에게 연파蓮坡란 아호를 내렸습니다.

 

출가 후에는 불법佛法을 깨우쳐주신 강원도 오대산 월정사의 방한암方漢岩스님과 한국불교의 대강백 박한영朴漢永스님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습니다.

 

방한암 스님은 선리禪理를 문답으로 가르치기도 했고 오도송悟道頌이라는 시구로 전해주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방한암 스님께 ‘평생에 좌우명이 될만한 한 마디를 일러 주십시오’ 했더니 ‘일붕이란 호는 구만리 장천을 주름잡아 나는 큰 새란 뜻이니 세계평화와 호국안민을 위해 큰 뜻과 큰 용기와 큰 안목을 가지라'고 일러주셨습니다.

 

박한영 스님은 팔만의 교리를 직접 가르쳤고 본인이 평생 소장한 진귀한 고서古書와 사기私記를 물려주셨고 직위를 전수하는 전강傳講까지 해주신 분입니다. 박한영 스님은 ‘머리를 돌리면 청산이 보인다.’라는 선구인 회두청산 廻頭靑山을 써주셨습니다.

 

이외에도 일붕이란 아호를 내린 유춘담 스님, 김포광 스님 등의 영향도 많이 받았습니다.”

 

 

일붕一鵬이란 호의 내력과 다른 불명佛名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일붕은 22세 때 유춘담 스님이 내려주신 법호인데, 장자의 남화경에 붕鵬이란 새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그 책에 의하면 붕이란 새는 한번 날갯짓을 하면 태양이 가려지고, 태풍이 일어나며, 구만리 창공에서 남극 바다로 쉬지 않고 먹지도 않고 6개월간 날기만 한다고 쓰여 있습니다.

 

전 세계를 대상으로 포교를 하라는 뜻으로 내리신 법호인데, 아주 적절한 법호라고 생각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유춘담 스님은 제자들에게 까마귀, 참새, 오리 등 새의 이름을 딴 법호를 내렸다는 것입니다.

 

첫 법명은 강혜월 스님께 받은 회암悔巖입니다.

 

스님은 불명을 내리시면서 ‘중국 달마대사가 소림굴에서 9년 면벽 끝에 개오하셨듯이 전생의 모든 업장을 참회하고 이 석굴 바위의 천정에서 감로수가 떨어져 방울이 생기듯이 수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불교계에는 4명의 스승이 있다는데 일붕은 어떤 스승들이 계셨습니까?

 

“은사恩師는 강혜월慧月스님이고, 계사戒師는 姜스님의 스승이며, 비구계比丘戒는 하동산 스님이 내리셨고, 법사法師는 유춘담 스님이십니다."

 

당대 최고로 평가받는 선필은 어떻게 공부하고 연구하여 이룩하셨습니까?

 

“철들기 전부터 붓을 잡고 조맹부체, 왕희지체, 구양순체 등 여러 서체를 익혔습니다.

 

이후 백파선사의 서체와 추사 김정희 체를 뛰어넘기 위해 수십 년간 정진을 거듭하여 독창적인 일붕 선필을 탄생시킨 것입니다. 글씨 이야기를 하면 항상 떠오르는 것이 고향 제주에서의 습작 시기입니다.

 

그때는 종이와 붓이 귀했기 때문에 돼지 털을 실로 묶어 만든 붓으로 나무판자를 검게 만든 필판筆板에다 먹 대신 물을 묻혀 글씨 쓰는 연습을 했습니다.

 

글을 가르치신 이지화 선생은 곱고 매끄러운 왕희지체를 주로 쓰신 분인데, 죽는 날까지 하루 한자씩이라도 꼭 쓰겠다는 자세를 가져야만 좋은 글씨를 쓸 수 있다고 강조하셨습니다.

 

불가에 입문한 이후에는 대중들과 생활하는 꽉 짜인 일정 때문에 거의 붓을 잡지 못하다 가르치는 처지가 된 월정사에 가서야 붓을 다시 들 수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추사체를 모델로 서법을 익히다 추사가 백파선사에게 참선을 배우고 난 뒤에야 경지에 올랐다는 사실을 유념하고 갈고 닦았습니다.

 

후에 경지에 오른 필법을 본 경봉 스님과 구하스님은 명필이라고 극찬한 일이 있습니다."

 

선필禪筆과 선화禪畵란 명칭은 언제 누가 처음 썼으며, 꼭 분류하자면 어떤 체에 가깝습니까?

 

“70년대 초 미국에서 포교 활동을 하다 외국인들에게 마땅한 설명이 없어 참선 수행을 한 스님의 붓글씨를 선필이라 하고 달마도나 수묵화를 선화라고 처음으로 명명한 것이 최초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선화禪話를 Zen Story로 번역한 것을 역으로 추리하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붓이나 먹을 처음 대하던 그들은 아무 힘없이 이리저리 휘고 부드러운 붓으로 글씨를 만들어 내기도 하고 그림을 그리기도 하는 것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어쨌든 붓글씨는 외국 포교의 유력한 수단이 되었습니다.

 

무아의 경지에서 일필휘지一筆揮之하는 필법은 그 어떤 체와도 다른 일붕체일 뿐입니다.

 

꼭 대답해야 한다면 대기대용大機大用 살활자재殺活自在살인도 활인검殺人刀 活人劍의 선법을 구사했던 백파선사와 氣가 살아 움직이는 방법으로 글의 각과 선을 일치시킨 추사의 필법을 나름대로 독특하게 발전시킨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면 일붕체의 특색은 무엇이며, 선필을 통한 포교 시의 에피소드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크게 세 가지의 특징이 있습니다.

 

필력筆力을 넣는 방법은 속필速筆, 정신을 넣는 방법 등입니다.

 

붓글씨에 힘을 넣는 것과 정신을 담는 그것은 참선 수행으로 얻은 고요한 마음의 경지를 살활자재殺活自在하게 운용하고 칠전팔기七顚八起해야만 가능합니다.

 

속필은 書家의 일반적인 서법을 정면으로 무시하고, 오히려 뛰어넘는 변칙을 다듬어 일가를 형성한 것이지요.

 

한 마디로 일붕 선필의 특징은 참선과 氣의 혼연일체를 통해 얻은 무한대의 정신영역을 채색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에피소드는 수없이 많습니다.

 

그 중 기억에 남는 것 하나만 소개하겠습니다. 

 

미국의 어느 대학에서 불교 강연을 마치고 나자 붓글씨가 유명하다는 소문을 들은 청중들이 서예 시범을 요청했으나 공교롭게도 그날따라 붓, 한지, 먹, 낙관을 찍을 인주가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문방사우가 준비되지 않은 것이지요. 사정을 설명했으나 다시 기회를 얻기가 어렵다고 여긴 청중들이 막무가내로 억지를 부렸습니다. 

 

생각다 못한 일붕은 궁여지책으로 양지洋紙에다 화가들이 쓰는 붓에 검은 잉크를 묻혀 글씨를 썼습니다. 낙관은 여성들의 핸드백에서 나온 빨간 립스틱으로 대신했지요.

 

사람들은 더 멋있다고 좋아했지만 입맛이 씁쓸했습니다. 그 뒤부터는 꼭 붓과 먹과 인주를 챙겼습니다.”

 

달마도는 언제부터 그렸으며, 어떤 특징이 있습니까?

 

“일본 임제대학(후에 하나조나대학,花園大學으로 변경)유학시절부터 달마백태達摩百態라는 책을 보고 달마도를 연습했습니다. 그 책은 학청기鶴淸氣란 분이 소전小傳을 썼는데 온갖 형태를 한 달마대사의 모습이 나옵니다. 

 

그때가 1940년대이므로 지금까지 약 50년간 달마를 그려온 셈이지요. 어느 분야나 마찬가지입니다만, 반세기 동안 그리다 보니 일가一家를 형성할 경지에 올랐습니다.

 

현재는 일붕의 예술을 대표하는 분야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일붕 달마도의 특색은 서 있는 달마라는 것과 짙은 묵으로 단번에 그린다는 점입니다. 그 외에 눈의 생김새, 수염과 눈썹의 유무 등도 차이점이 되겠지요. 옛 고승들은 서예, 게송(불교시, 오도시, 열반시 등), 달마도의 3가지 조건을 갖출 때 비로소 고승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고 했습니다.”

 

 

불가佛家에서는 어떤 분께 무엇을 배웠으며, 일본 유학은 누구의 주선으로 이루어진 것입니까? 또 일본 유학 시절의 일화와 동국대에 재입학하신 이유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십시오.

 

“가장 기초적인 것은 출가 전에 이미 많은 불서를 읽어서 배웠습니다만, 본격적인 공부는 역시 머리를 깎아주신 강혜월 은사 스님 밑에서 익혔습니다.

 

출가 후 약 1년간 산방굴사와 법정사를 오가며 염불 독경, 법요 집행의 예식, 교리, 참선 등을 배우고 익히다 더 넓은 세계로 나가고자 지리산 화엄사로 갔습니다. 

 

화엄사에서는 송경허 스님께 선지를 받고 문자 견성을 하여 선교를 겸한 진진응 대강백께 사집과 사교를 뛰어넘어 화엄경 강의를 받았습니다. 아랫반이 당시에 없었고 출가 전에 사서삼경에 통달했다는 경력이 인정된 것이지요.

 

다음에는 전북 완주군 위봉사가 개설한 송광사 강원에서 법호를 내린 유춘담 스님의 지도 아래 사미과와 사집과를 마쳤습니다.

 

재정난으로 이 강원이 문을 닫자 서울 동대문 개운사와 대원암에서 박한영 강백께 사교과와 대교과를 배웠습니다. 

 

이곳에서는 '살아있는 사전'으로 불리던 박한영 스님께 불교뿐만 아니라 유교와 도교까지 모두 배웠고 만해 한용운, 육당 최남선, 춘원 이광수 등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4년여를 공부한 다음에는 박한영 스님께서 자신이 직접 풀이하고 주석을 붙인 사기私記를 물려주고 강원도 평창군 오대산 월정사의 강사로 가도록 추천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일붕은 곧장 월정사로 떠나지 않고 전북 김제 금산사로 가서 포광 김영수 스님께 식수 행상을 6개월간 더 배우고 월정사로 떠났습니다. 그런데 박한영 스님은 동국대의 전신인 불교전문학교 교장을 오랫동안 지냈고, 포광 스님은 후에 동국대 총장을 지낸 분들이라 일붕에게 큰 도움을 음으로 양으로 계속 주셨습니다. 

 

월정사에서는 학인들을 지도하는 한편 신선 같던 당대의 선지식 방한암 스님께 선禪의 진수를 배우고 물려받았습니다. 방한암 스님은 때때로 일붕과 대화를 나누었는데, 어느 날 일붕에게 큰 용기와 큰 뜻을 가지라고 격려하면서 다음과 같은 서산대사의 시를 일러 주셨습니다.

 

아무리 이름난 호걸들도 / 초파리 떼가 초 항아리에 나르는 듯하고 / 아무리 큰 나라의 도시들도 /개미 떼가 흙 봉우리를 쌓아놓은 듯하여라. 창 아래 밝은 달 / 청허한 베개 위에 / 끝없는 솔바람 그 소리 시원하여라.

 

당대의 선지식과 대강백들께 선과 교를 배운 행운을 누린 것이지요.

 

일본 유학은 포교 왕으로 명성을 떨치던 김태흡스님이 권하고 월정사 이종욱 주지께서 일본 경도의 임제종 묘심사 경내에 있던 임지전문대학으로 보내주신 것입니다. 이때 유종묵씨가 현지에서 여러 도움을 주셨습니다.

 

임제대학에서는 출가 전에 익힌 한문 실력을 발휘하여 교수들까지 놀라게 했는데, 그들의 엄격한 참선 자세는 본 받아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동국대에는 일본 패망 직후 귀국하였으나 국내에 대학원 과정이 개설되지 않아 영어를 비롯한 신식학문을 더 배우고자 입학한 것입니다."

 

외국어는 몇 개나 구사하십니까?

또 소문에는 5개국어 이상을 능통하게 하신다는데 그게 사실입니까?

 

“완전하게 막힘이 없이 구사하는 것은 영어와 일어입니다. 미국과 일본에서 오랫동안 생활했기 때문이지요.

 

중국어는 한문 실력이 뛰어나다 보니 그렇게 알려진 것인데, 실제로는 잘하지 못하고 겨우 대화를 나눌 정도입니다.

 

그래서 중국인을 만나면 자주 막히는 말보다 정확한 뜻이 전달되는 필담筆談을 나눕니다. 독일어는 함부르크대학 교수 시절 현지에서 익혔습니다만, 역시 중급에 머물고 있습니다. 

 

스페인어는 남미 포교 시, 책을 번역하는 관계로 배우려고 힘썼습니다. 그러나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수준에 불과합니다. 러시아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때문에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는 말은 한국어, 영어, 일어인 셈이지요.”

 

국내외의 어느 대학에서 교수로 계셨으며, 외국대학에는 어떤 연유로 나가시게 되었습니까?

 

“국내에서는 전북대, 원광대, 해인대, 동아대, 부산대, 동국대, 경남대, 영남대학원, 충남대학원, 일붕 삼장대학원에서 강의를 했습니다.

 

해외에서는 미얀마 상가대, 서독 함부르크대, 영국 런던대, 스리랑카 Vidyodaya대, 대만 문화대, 필리핀 필리핀대, 인도 국제대, 중국 함수대, 러시아 국립티베르대, 덴마크 헤스비에르그 평화연구대, 일본 정치대 등 수많은 대학에서 강의했습니다. 미국의 대학은 컬럼비아대. 워싱턴대, 캘리포니아대, 하와이대, 템플대 등에서 교환교수를 지낸 경력이 있습니다. 일반 강의를 했던 대학은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해외의 교환교수는 1958년 제5차 방콕 세계불교도대회에 아세아재단의 후원을 받아 하동산 종정, 이청담 총무원장과 함께 한국 대표로 참석한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대회에 참석한 각국 대표들과 인연을 맺은 것을 시작으로 여러 나라의 대학에서 교환교수 요청을 받은 것입니다.”

 

스님, 이것이 궁금합니다, 21번째 이야기-보통 사람은 평생에 한 권을 내기도 어렵다는 저서를 어떻게 9백여 권 가깝게 쓸 수 있었을까요? 가 다음호에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