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등불 하나가 천 년의 어둠을 밝힙니다. 거대한 세상 속, 우리는 때로 깊고 긴 어둠을 마주합니다. 삶의 고단함, 인간 관계의 상처, 미래에 대한 불안, 그 모든 것들이 우리 마음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가끔은 아무리 걸어도 길이 보이지 않는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가르치셨습니다. "一燈能破 千年之暗" 작은 등불 하나가 천 년을 이어온 어둠을 단숨에 걷어낸다고. 등불은 크거나 화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맑은 마음, 진실한 자비, 따뜻한 손길 하나면 충분합니다. 부모님의 사랑이, 자녀들의 순수한 웃음이, 형제자매 간의 작은 배려가 그 자체로 등불이 되어 가정이라는 작은 세계를 환히 밝힙니다. 한 가족이 마음을 모으면, 한 사람의 작은 선행이 이어지면, 그 빛은 가정을 넘어 세상으로 퍼져나가고, 끝내 이 세상의 어둠마저 물리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다짐해야 합니다. 내 안에 등불을 지피고, 내 가족의 등불을 함께 모아, 더 밝은 하루, 더 따뜻한 세상을 만들어 가겠노라고. 등불은 바람에도 흔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꺼지지 않는 것은 그 안에 담긴 진심 때문입니다. 사랑과 믿음, 이해와 용서로 이어진 가족의 인연은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작은 복덕이라도, 그 안에 깃든 마음이 크면 하늘도 감동합니다." 우리는 종종 큰 공덕, 큰 복을 바라고 수행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一切福德 從微善起일체복덕 종미선기」 모든 복덕은 아주 작은 선행에서 비롯된다고. “소분복덕少分福德”이란 말은 겉으로는 작고 보잘것없어 보일지 모르나, 그 안에는 수행자의 진심, 자비의 씨앗, 깨달음의 발심이 담겨 있다는 뜻입니다. 길을 걷다 쓰러진 나뭇가지를 치워주는 손길, 배고픈 이에게 내미는 따뜻한 한 그릇,이른 새벽 법당에 홀로 등을 밝히는 그 마음이 모두가 소분복덕입니다. 세속은 성과를 크기로 판단하지만, 불가는 그 마음의 깊이와 청정함을 먼저 봅니다. 복은 남에게 보이기 위해 짓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마음을 밝히기 위해 짓는 것입니다. 소분복덕을 쌓는 이의 길은 비록 느릴지언정 결코 퇴보하지 않습니다. 큰 물줄기도 작은 이랑에서 흘러나오듯, 부처의 길도 작은 복덕의 실천에서 비롯됩니다. 우리도 오늘, 작은 복 하나라도 실천해봅시다. “작은 복덕이 쌓여 큰 깨달음의 길이 됩니다.” “소분의 공양도 진심이면 부처님께 이릅니다.” 이 말씀을 항상 마음에 새기며 살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갈등은 관계의 시작이고, 번뇌는 성장의 밑거름입니다” 살다 보면 누구나 갈등을 겪습니다. 가족 안에서도, 친구 사이에서도, 때로는 나 자신과도 싸우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왜 나만 이렇게 힘들까"라는 생각에 빠지기 쉽습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삶은 고苦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 고통은 벌을 받아서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거이며, 마음이 깨어나야 할 이유이기도 합니다. 청소년 시절은 누구나 혼란스럽습니다. 부모님 말씀은 간섭처럼 느껴지고, 친구들과의 관계는 민감하게 흔들립니다. 하지만 이 시기의 감정 하나하나가, 우리를 좀 더 깊고 넓은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내면의 씨앗입니다. 부모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를 아끼는 마음이 커서 걱정이 많고, 그 걱정이 때때로 간섭이나 훈계처럼 비춰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마음의 바탕에는 사랑이 있고,자녀가 행복하길 바라는 절절한 염원이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 다르고, 생각도 방식도 다르지만, 그 다름 속에서 자비와 이해가 시작됩니다. 갈등은 끝이 아니라, 서로를 더 잘 알게 되는 시작입니다. 번뇌는 괴로움이 아니라, 나를 돌아보게 하는 마음의 거울입니다. 그래서 법당에서는 먼저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불법佛法을 배우고자 하는 이들이 가장 많이 묻는 것 중 하나가 “부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나는 언제 부처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전해진다. "천세항금일, 삼신위일신.""千世恒今日, 三身爲一身." 천 년이 지나도 오늘이고, 세 가지 몸은 결국 하나로 돌아가네. 이는 무엇을 뜻하는가? 부처님께서는 법신法身, 보신報身, 응신應身의 세 가지 몸을 가지셨다. 삼신三身의 의미, 법신(法身, 진리의 몸) 부처님의 본래 모습으로, 변함이 없는 진리를 의미한다. 태어나고 사라지는 모든 현상 너머에 존재하는 절대적 진실이다. 마치 하늘이 늘 그 자리에서 온 세상을 품고 있는 것과 같다. 우리는 이 법신을 직접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지만, 언제 어디서나 존재한다. 보신(報身, 공덕의 몸).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이루신 몸이다. 부처님께서 수행을 통해 얻으신 지혜와 자비의 모습이 보신이다. 중생이 원하고 바라면, 부처님께서는 보신으로 나타나 가르침을 주신다. 정토淨土에서 법을 설하시는 아미타불阿彌陀佛과 같은 모습이다. 응신(應身, 현현하는 몸), 부처님께서 중생을 교화하시기 위해 이 세상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천진면목天眞面目"은 선종禪宗에서 자주 등장하는 개념으로, 문자 그대로 풀이하면 "하늘이 준 참된 얼굴"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본래의 자성自性, 즉 우리가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깨달음의 본래 모습, 있는 그대로의 진실한 모습을 의미합니다. 조주趙州 선사가 어느 제자에게 "네 본래 면목을 보았느냐?"라고 물었을 때, 그 뜻을 모르는 제자는 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조주 선사는 여기에서 본래 면목이란 우리가 억지로 만들어낸 모습이 아니라, 시비와 분별을 떠나 순수하고 가식 없는 존재 그 자체임을 가르쳤습니다.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천진한 본래 면목을 잊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타인의 평가에 흔들리고, 명예와 이익을 좇으며, 비교와 경쟁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립니다. 그렇게 살아가다 보면 본래의 맑고 깨끗한 마음을 덮어버린 채, 인위적인 가면을 쓰고 세상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깊이 들여다보면, 우리의 참된 모습은 결코 더럽혀질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구름이 하늘을 덮어도 하늘 자체는 변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천진면목은 언제나 우리 안에 존재하며, 단지 우리가 그것을 보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천진면목을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오늘 우리는 ‘수처작주, 입처개진 隨處作主, 立處皆眞’이라는 가르침을 되새겨 봅니다. 이 말은 어디에 있든 주인이 되면, 그 자리 자체가 진리의 자리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삶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환경 속에 놓여 있습니다. 기쁨과 슬픔, 성공과 실패, 안락과 고난이 교차하는 가운데 우리의 마음이 흔들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환경에 휘둘리지 않고, 그 자리에서 스스로 주인이 된다면 모든 순간이 수행의 도량이며, 모든 곳이 깨달음의 터전이 됩니다. 주인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권위를 갖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온전히 책임지고 현재에 깨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남에게 의존하는 삶이 아니라, 스스로 삶을 개척하고, 매 순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수행자의 길입니다. 또한 ‘입처개진’은 우리가 서 있는 곳이 그대로 진리의 자리임을 깨닫게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깨달음이 특별한 장소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라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우리가 머무는 그곳이 곧 법당이며 수행처입니다. 지금 이 순간, 어디에 있든 ‘주인’이 되어 마음을 바르게 쓰고, 그 자리에서 참된 진리를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오늘은 眞如不二진여불이, 즉 "진리는 둘이 아니다"라는 가르침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진여眞如’는 모든 존재의 본래 모습, 즉 변하지 않는 진리를 뜻합니다. 이는 분별과 차별이 개입되지 않은 절대적 실상을 의미합니다. 불교에서 깨달음이란 바로 이 진여를 체득하는 것이며, 모든 번뇌와 망상을 떠나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불이不二’란 두 개로 나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세상은 흔히 선과 악, 옳고 그름, 나와 남이라는 이분법적인 시각으로 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이러한 구분이 없습니다. 이는 《금강경》에서 말하는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어느 곳에도 집착하지 않고 마음을 내라는 가르침과도 일맥상통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 등의 분별심에 사로잡힙니다. 하지만 모든 것은 본래 하나의 진실된 모습에서 비롯되었고, 상대적인 구분은 인간의 인식 속에서 생겨난 것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진여불이를 체득하는 수행이란, 본래의 자리에서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차별 없이 평등한 마음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진여불이의 가르침을 삶에서 실천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습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번뇌와 욕망 속에서 본래의 자신을 잊고 흔들리며 살아갑니다. 세상의 소리에 휩쓸리고, 남들의 시선에 얽매이며, 때로는 자신의 본모습조차 알지 못한 채 방황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본성本性은 언제나 변함없이 그 자리에서 빛나고 있습니다. “본연本然의 자리”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태어나기 전에도 있었고, 죽음 이후에도 변하지 않는 참된 자리입니다. 탐욕과 성냄, 어리석음에 가려져 있지만, 본래 맑고 고요하며 자유로운 자리입니다. 우리가 번뇌를 걷어내고 집착을 놓으면, 그 자리에는 언제나 밝은 지혜와 한없는 자비가 있습니다. 세속의 삶은 마치 흐르는 강물과 같습니다. 끊임없이 변화하고, 때로는 거센 물살에 휩쓸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강물 아래 깊은 곳은 언제나 고요하고 흔들림이 없습니다. 우리의 본래 자리도 이와 같습니다. 아무리 삶이 거칠고 복잡할지라도,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면 모든 것이 편안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합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나의 본래 모습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마음을 닦고,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법왕청신문 이준석 기자 | 개부구족開敷具足은 연꽃이 피면 반드시 열매를 맺는다는 뜻입니다. 이는 불교의 가르침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우리의 신행信行과 수행의 방향을 시사합니다. 연꽃은 진흙 속에서 자라지만 맑고 아름다운 꽃을 피웁니다. 이는 혼탁한 세상에서도 깨달음의 길을 걸을 수 있음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연꽃이 한 번 피면 반드시 열매를 맺듯이, 올바른 원願을 세우고 정진하면 반드시 그에 합당한 결과를 얻게 된다는 법칙을 보여줍니다. 이 가르침은 우리에게 세 가지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불교에서는 인과(因果)의 법칙을 강조합니다. 선한 씨앗을 심으면 선한 결과가 오고, 악한 씨앗을 심으면 그에 따른 과보를 받습니다. 우리가 수행을 통해 지혜와 자비를 실천하면 반드시 그 공덕이 우리 삶에 열매로 맺힙니다. 연꽃이 피려면 물과 햇빛, 시간이 필요하듯이, 수행과 신행도 꾸준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단순히 불법佛法을 듣고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그것을 몸소 실천하고 생활 속에서 꽃피워야 합니다. 연꽃은 진흙에서 자라지만 더러움에 물들지 않습니다. 우리도 세속의 번뇌와 고난 속에서도 물들지 않고 깨끗한 마음을 유지해야 합니다. 불교 수행을 통해 내면을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우리는 불법佛法을 배우고 수행하는 길에서 "유연중생有緣衆生"이라는 말을 자주 접합니다. 유연중생이란 ‘인연이 있는 중생’을 뜻하며, 불법과 인연이 있는 모든 존재를 가리킵니다. 이는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과거에서부터 맺어온 깊은 인연 속에서 지금 이 순간 함께 불법을 나누고, 수행의 길을 함께 걸어가게 된 존재들입니다. 불교에서는 모든 존재가 인연에 의해 만나고 헤어진다고 가르칩니다. 씨앗이 적절한 토양과 비와 햇빛을 만나야 싹을 틔우듯, 우리 또한 특정한 인연이 성숙할 때 비로소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그것을 이해하며 실천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유연중생의 의미입니다. 불법과 인연을 맺은 중생은 필연적으로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게 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불법과의 인연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닙니다. 무량겁無量劫의 생애 속에서 수많은 인연이 얽혀 우리가 지금 이 순간 법을 듣고 수행하는 기회를 얻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인연을 소중히 여기고 더욱 정진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맺은 인연을 통해 더 많은 중생에게 불법을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유연중생뿐만 아니라 아직 불법과 인연을 맺지 못한 중생도 많습니다. 우리
법왕청신문 이존영 기자 |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는 일도, 도움을 주는 일도 참 많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우리 마음속엔 늘 물음표가 하나 떠다니죠. “나는 과연 받는 사람이 될까, 아니면 주는 사람이 될까?” 받는 사람은 순간의 기쁨을 얻지만, 주는 사람은 영원의 빛을 남깁니다. 오늘은 여러분과 함께 이 빛나는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물위수혜자(勿爲受惠者) : 받는 자가 되지 말라! ‘물(勿)’은 하지 말라는 뜻이고, ‘위(爲)’는 행동하다는 말, 그리고 ‘수혜(受惠)’는 도움이나 은혜를 받는 것을 말하죠. 즉, 남의 도움에만 의지하며 살지 말라! 이 말씀입니다. 왜냐고요? 받는 데만 익숙해지면, 감사는 잊혀지고 욕심만 늘어납니다. 세상이란 게 참 신기해서, 받기만 하면 언젠가 그 손길은 멈추지만, 주는 마음은 끝없이 이어지는 법이니까요. 항위시여자(恒爲施與者) : 항상 주는 자가 되라! ‘항(恒)’은 변함없이, 언제나를 뜻하고, ‘시여(施與)’는 나누고 베푸는 것을 말합니다. 즉, 언제 어디서나 주는 삶을 실천하라는 말씀이죠. 주는 사람은 누군가를 밝히는 등불이 됩니다. 그리고 그 등불의 빛은 주는 사람의 삶도 환하게 만듭니다.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오늘 우리는 불교의 근본적 가르침 중 하나인 ‘자타일여自他一如’와 우리의 본성인 ‘청정본연淸淨本然’의 의미를 함께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불교는 언제나 우리에게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그 답은 우리의 존재가 결코 홀로 떨어져 있지 않으며, 모든 생명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깨달음에서 시작됩니다. 자타일여(自他一如)의 의미 ‘자타일여’란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나와 남이 하나다”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흔히 느끼는 ‘나’와 ‘남’이라는 분리는 실제로는 무지에서 비롯된 착각일 뿐입니다. 내가 기뻐하면 주변 사람도 기뻐지고, 내가 고통을 겪으면 그 고통이 곧바로 남에게도 영향을 미칩니다. 불교의 연기법緣起法은 이러한 상호 의존성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우리는 서로 분리된 독립체가 아니라 서로에게 의지하며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마치 바다의 파도가 서로 다른 모습처럼 보이지만, 결국 한 물결 속에 연결되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자타일여’를 이해하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남을 나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거나 해치려 하지 않게 됩니다. 남의 고통이 곧 나의 고통임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깨달음은
법왕청신문 이준석 기자 | 이 고사는 동방삭이라는 중국 전설 속 인물을 중심으로 한 재미있는 이야기에서 비롯됩니다. 이 고사를 통해 지혜와 삶의 소중함에 대해 나누는 법문을 구성해 보겠습니다. 삼천갑자의 삶과 동방삭의 지혜 동방삭은 한나라 시대의 전설적인 인물로, 비범한 재주와 유머 감각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지혜로웠고, 천문과 지리, 문학과 예술을 두루 익혔습니다. 하지만 그가 유명해진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동방삭은 무려 삼천갑자三千甲子, 즉 18만 년을 살았다고 전해지는 불사의 인물입니다. 그가 이렇게 긴 삶을 살게 된 이유는 그의 뛰어난 지혜와 꾀 때문이었습니다. 어느 날, 옥황상제가 불로초를 관리하는 천녀들에게 명하여 인간계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동방삭은 이 천녀들이 가져온 불로초를 슬쩍 먹어버렸고, 이를 통해 불사의 존재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옥황상제의 노여움을 피하기 위해 하늘과 땅, 세상의 모든 이치를 배우며 지혜롭게 살아갔습니다. 이야기를 통한 교훈 1. 시간의 무한함, 그리고 삶의 유한함 삼천갑자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긴 시간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오래 산다 해도, 삶에서 느끼는 소중한 순간들은 우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오늘은 '지행일치知行一致'에 대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知行一致'란 '앎과 행함이 하나로 일치한다'는 뜻으로, 우리 삶 속에서 진정으로 알고 있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며 실천하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이 개념은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 속에서도 강조되었으며, 나아가 우리가 수행의 길을 걸으며 실천해야 할 중요한 덕목입니다. 우리는 흔히 많은 것을 배워 알고 있습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지혜는 현대 사회 속에서도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그 지식만으로 삶의 변화를 이루지는 못합니다. 앎을 넘어 실제 삶에서 그것을 구현하는 것, 즉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입니다. 이런 어려움이 바로 '지'와 '행'이 분리되는 지점에서 발생합니다. 지행일치란 단순히 좋은 것을 알고 있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그 앎을 우리의 생활 속에 녹여내어 실천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는 우리가 배운 진리를 행동으로 옮기는 순간에 진정한 의미가 발현됨을 깨닫게 해줍니다. 불교의 실천과도 맞닿아 있는 이 개념은 우리가 평소 마음속에 품은 바를 일상생활에서 진실되게 실천하도록 요구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
법왕청신문 이정하 기자 | "아상我相"에 대한 법문은 불교에서 자아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는 가르침과 관련이 있다. "아상"은 말 그대로 '나'라는 생각, 즉 자아의 실재성에 대한 집착을 의미한다. 이를 내려놓음으로써 참된 깨달음에 이른다는 것이 불교의 중요한 가르침 중 하나이다. 우리는 누구나 '나'라는 존재가 실재한다고 믿으며 살아갑니다. 내가 보고, 듣고, 느끼며, 그 모든 것들이 '나'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이 '나'라는 생각은 실체가 없는 허망한 집착일 뿐이다. 아상이란 무엇입니까? '아상'은 '나'라는 생각에 대한 집착이다. 나를 기준으로 세상을 보고, 그에 따라 좋고 나쁨, 옳고 그름을 판단한다. 이 '아상'은 우리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며, 스스로 고통을 만들어내고 있다. 내가 손해를 보거나 무시당할 때 분노하고, 내가 얻는 것이 있을 때 기뻐하며, 항상 '나'라는 존재가 중심이 된다. 하지만 이는 참된 자아가 아니라, 환상 속에서 생긴 집착일 뿐이다. 자아의 실재성은 허망한 것 부처님은 모든 것이 인연으로 생겨나고 사라지며, 고정된 실체가 없다고 가르치셨다. '나' 또한 고정된 실체가 아닌, 인연에 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