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왕청신문 이존영 기자 | 초대법왕 일붕 서경보 존자님의 일대기 세계일화 10. 배운 것을 남에게 나누어주며 일본어를 다 익히기도 전에 일붕스님은 1944년 31세의 나이로 일본으로 떠나게 되었다. 월정사 이종욱 주지스님이 일본 경도의 유종묵씨를 소개해주며 ‘이왕 갈려면 하루라도 빨리 떠나라’고 독촉했기 때문이다. 학비는 이종욱 스님이 도와 주었다. 부산으로 내려가 관부연락선을 타고 현해탄을 건넜다. 유씨의 주선으로 들어간 대학은 임제종 묘심사 경내에 있는 경도의 임제대학 전문 학부였다. 그곳에서도 재능을 인정받아 조교로 일하기도 했다.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조국이 해방되자 일붕스님은 '더 이상 일본에 머무를 이유가 없어' 서둘러 귀국했다. 서울로 와보니 대학원은 아직 안 생겨 대학 밖에 없었다. 그래서 일붕스님은 '공부처럼 즐거운 것이 없는데, 4년만 더하자,고 생각하고 1946년 동국대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동국대학에는 권상로, 김영수, 김인석, 김동화, 등의 쟁쟁한 교수진이 계셨다. 이때 일붕스님은 동대문 밖 창신동 안양암의 포교사로 있으면서 학교를 다녔다. 안양암의 이태준 주지스님은 일봉 스님을 여러 가지로 도와주신 분이다. 일봉 스님이 학생의 신분
법왕청신문 이존영 기자 | 초대법왕 일붕 서경보 존자님의 일대기 세계일화 9. 비상하기 위한 붕새의 날개 짓 1935년 가을. 경보 스님이 21세가 되던 해에 전진응 강백의 수제자가 전북 완주군 위봉사의 초청강사가 되어 그 곳을 떠났다. 강백을 따라간 경보스님은 그곳으로 떠났다. 그 강백을 따라간 경보스님은 그 곳에서 사미과와 사집과를 마쳤다. 이때 실제로는 전중에 있는 '송광사'에서 강원을 열었다. 위봉사에서 첫 밤을 맞았던 날이었다. 잠든 스님들 틈에서 살그머니 빠져나와 방 윗목에 있는 호롱불에 불을 켜고 화엄사에서 가져온 <화엄경 현담>이란 책을 꺼내 막 읽기 시작할 때였다. 밖에서 천둥치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리더니 칠 흙 같은 밤이 대낮처럼 밝아졌다. "경보야, 자지 않고 공부하는구나."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예…." 벌떡 일어나 예를 갖추고 싶었지만 목이 막혔고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곧이어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장자에 나오는 붕새다. 내가 날개를 펴면 태양빛도 가려진다." 깜짝 놀라 일어나보니 꿈이었다. “묘한 꿈이었구나. 붕새가 나를 찾아오다니….” 경보스님은 이미 장자의 남화경에 나오는 붕새를 알고 있었다. 또 그렇게 큰
법왕청신문 이존영 기자 | 초대법왕 일붕 서경보 존자님의 일대기 세계일화 8. 큰 스승을 찾아서 1933년 10월 초순. 경보 스님은 전남 구례군 '화엄사'에 진진응이란 큰 스님이 계신다는 것을 알고 여수로 향하는 목선에 몸을 실었다. 조그마한 목선이 망망한 대해에서 세차게 파도치는 물결을 뒤로 하고 둥둥 떠가는 모습은 마치 넒고 넓은 하늘의 한 조각구름 같았다. 목선이 바다 한 가운데 이르자 풍파가 심해졌다. 세찬 파도가 뱃머리를 때릴 때마다 목선이 도리질하여 여자들이 멀미로 몸을 가누지 못했다. 멀미가 심한사람은 먹은 것을 모두 선실바닥에다 토했다. 파도가 점점 심해졌다. 목선은 심하게 흔들렸고 사람들은 울부짖었다. 마음이 약한 사람은 무서워 떨었고 기절하는 사람도 있었다. 경보 스님은 '이것이 고행의 시작이다'고 여기며 <천수경>과<반야심경>을 소리 내어 외웠다. 파도가 갈수록 거칠어지자 처음에는 태연하던 뱃사공들까지 파랗게 질려서 안절부절 했다. 경보 스님이 뱃사공에게 물었다. "왜 배가 방향을 못 잡고 제 마음대로 흘러가는 것이오?" "너무 짐을 많이 실어 우리가 배를 마음대로 부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짐짝들만 없애면
법왕청신문 이존영 기자 | 초대법왕 일붕 서경보 존자님의 일대기 세계일화 7. 결혼에 이어 출가 일본에서 돌아와 집안일도 돕고 그동안 못 읽었던 책도 읽으면서 훌륭한 스승을 찾아 뭍으로 떠날 계획을 짜고 있었다. 어느 날 할아버지께서 경보를 찾으셨다. "할아버지, 저를 부르셨습니까?" 무릎을 꿇고 앉은 경보를 보고 할아버지께서는 조용한 말씀하셨다. "경보야, 나는 네가 더없이 자랑스럽구나. 내게 응석을 부리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어엿한 청년으로 자랐구나. 이 할애비를 실망시키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더니 서당의 훈장까지 되었으니 그저 장할 뿐이다. 그런데 남을 가르치려면 어른이 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나이도 열여섯이나 되었으니 혼사를 치르는 것이 좋겠다. 또 나도 많이 늙었으니 증손자를 안아보고 이 세상을 떠나고도 싶고…." 눈앞이 캄캄했다. 경보는 온갖 핑계를 다 말하면서 할아버지를 설득하려 했다가 오히려 호된 꾸지람을 들었다. 경보는 결혼을 해야 한다는 할아버지의 권유를 받자 얼떨결에 육지로 나가 신학문을 배우겠다는 말을 했다. "뭐라고! 학교엘 가려고 장가를 못가겠다고? 고약한 놈 같으니라고! 그래 꼭 왜놈의 종살이를 하겠다는 것이구나?" "할아버지
법왕청신문 이존영 기자 | 초대법왕 일붕 서경보 존자님의 일대기 세계일화 6. 더 넓고 큰 세계로 서당의 훈장으로 명성을 얻어 가족들이 기뻐하는 것과는 반대로 경보는 답답함을 느꼈다. 서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나서 집에 돌아와 뒷밭에 귤을 심던 경보는 자신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내대장부로 태어나 천하를 노려도 부족하거늘 어찌 좁은 섬 구석에서 코흘리개들의 훈장 노릇이나 하고, 귤나무를 심어 그 열매가 맺길 기다려야 되겠는가? 그렇다. 뭍으로 나가자. 넓은 곳으로 나가 훌륭한 스승을 찾아 더 깊은 공부를 하고 큰 뜻을 펼치자! 세계는 나날이 발전하는 데 어찌 옛 학문인 한자만 익혀서 앞서가는 사람이 될 수 있겠는가?’ 이런 생각이 일어나면<장자>란 책의 <남화경> 첫 편에 나오는 붕새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남화경>에는 상상의 새인 붕새를 이렇게 쓰고 있다. "북방의 조그만 새가 하루아침에 갑자기 커져서 날개 짓을 하니 태풍이 일어나고 태양빛을 가릴 정도의 위세로 바람을 일으켰고, 몇 차례 날개 짓을 하다가 남쪽을 향해 구만리 창공을 먹지도 쉬지도 않고 6개월간을 날았다." 경보는<남화경>에 나오는 붕새를
법왕청신문 이존영 기자 | 초대법왕 일붕 서경보 존자님의 일대기 세계일화 5. 훈장이 된 경보의 가르침 경보는 훈장이 되고 나서 재미있고 쉽게 가르친다는 원을 세웠다. 공부가 너무 딱딱하고 어려우면 학동들이 서당을 '지긋지긋한 곳'으로 여길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무조건 외우고 쓰라고 하던 옛 방식에서 벗어나려고 애썼다. 예를 들면 맹자의 성선설과 순자의 성악설을 가르치면서, 무조건 ‘맹자는 인간의 본성이 착하다고 했고 순자는 사람은 원래부터 악하다’고 하지 않았다. 즉 성선설을 설명하면서 ‘어린이가 우물가에서 우물 안으로 떨어지려고 할 때 사람이면 누구나 뛰어가서 그 어린 아이를 구할 것이다.’고 풀어서 가르치는 방법을 썼던 것이다. 부모님의 은혜를 가르칠 때는 이런 이야기를 해 저절로 깨닫게 했다. 옛날 가뭄이 심하여 나라 안이 온통 가난과 질병이 들끓게 되자, 임금이 '나이가 많은 노인들을 산에 대려가 구덩이를 파고 묻어라' 하는 명령을 내렸다. 어느 아들이 국법을 어길 수 없어 늙은 어머니를 등에 업고 산으로 묻으러 갔다. 아들은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을 참고 그저 묵묵히 걸었다. 어머니는 자기를 땅에 파묻으러 간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들이 무거워
법왕청신문 이존영 기자 | 초대법왕 일붕 서경보 존자님의 일대기 세계일화 4. 마을의 훈장이 되다. 엉뚱한 질문을 자주 하여 스승을 곤란하게 만들던 경보가 15세가 되던 해에 서당의 훈장 선생님이 신경통으로 자리에 눕게 되었다. 자리에 눕게 된 스승이 어느 날 경보를 불러 서당의 훈장을 맡으라고 부탁했다. "경보야, 내가 몸이 아파 더 이상 공부를 가르칠 수 없게 되었으니 네가 나를 대신하여 서당을 끌어갔으면 좋겠구나." "아니 될 말씀이옵니다. 어서 빨리 병을 떨치고 일어나셔서 저희들을 계속하여 배움의 길로 이끌어 주십시오. 스승님은 곧 일어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니다. 내 병은 내가 안다. 다시 일어난다 해도 전처럼 너희들을 호통치고 가르칠 만한 힘이 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경보 네가 이 기회에 훈장을 맡았으면 한다." "스승님, 저는 아직 글도 짧고 나이도 어려 훈장을 맡을 수 없는 처지입니다. 제발 쾌차하셔서 저희들을 다시 가르쳐 주십시오." "아니다. 내가 보기에는 네가 이미 나의 수준을 넘어선 것 같구나. 글공부는 나이로 하는 것이 아니란 것은 경보 너도 잘 알고 있지 않느냐?" "스승님, 저도 군사부일체를 스승님께 배워서 스승의 뜻을
법왕청신문 이존영 기자 | 초대법왕 일붕 서경보 존자님의 일대기 세계일화 3. 할아버지의 가르침 "할아버지, 저는 신학문을 가르치는 학교엘 가고 싶어요. 서당보다 학교를 보내 주세요." "뭐라고, 왜놈들이 가르치는 신학문을 배우고 싶어 학교를 간다고?" "할아버지, 학교엘 간다고 왜놈이 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안 된다. 누가 뭐라고 해도 안 된다. 학교에 가 왜놈 말과 글을 배우면 왜놈의 종노릇 밖에 할 것이 없는데, 그놈들의 종노릇을 하려고 돈 들여 공부한단 말이냐?" "할아버지, 저는 학교를 다니고 싶어요. 한문은 다 배웠는걸요." "안된다면 안 되는 줄 알아라. 다시는 학교에 간다는 말은 아예 입 밖에도 내지 마라." 경보는 그때까지 할아버지가 그처럼 화를 내시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할아버지는 비록 배우지 못해 고기잡이로 생계를 꾸렸지만 기개가 높고 성격이 강직했으며, 남다른 의리가 있는 행동으로 주위의 신망을 얻는 분이었다. 때문에 결코 사사로운 일로 남에게 머리를 숙이지 않았고 이웃에 어려운 일이 생기면 앞장서서 도왔다. 경보가 태어난 제주도의 이천 서 씨 가문은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부지런히 일을 해서 비교적 넉넉한 살림을 꾸린 집이었다
법왕청신문 이존영 기자 | 초대법왕 일붕 서경보존자님의 세계일화 2. 총명한 도사 아이 할아버지는 경보를 틈나는 대로 무릎에 앉혀 놓고 귀여워하고 잠도 데리고 잤다. 그러면서 늘 '우리 도사, 우리 도사' 하며 사랑스러워 했다. 경보는 한번 들으면 잊지 않고, 한번 본 것은 반드시 기억하여 동네어른들로부터 '총명한 아이'라는 칭찬을 자주 들었다. 이런 경보를 잘 가르쳐 뛰어난 인물로 키워 기울어진 가문을 일으켜야 한다고 여긴 할아버지는 일찍 글을 가르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경보는 제주도에서 가장 뛰어난 글재주를 가졌다는 외삼촌 이지화 선생께 글을 배우다 동네 서당을 다니게 되었다. 6세가 되자 경보는 이미 어지간한 한문을 다 읽고 쓰게 되었으며, 10세 때에는 그 어렵다는 사서삼경을 줄줄 외우고 풀었다. 이렇게 공부는 잘했지만 경보는 도무지 아이답지 않은 행동을 자주 해 집안 어른들의 걱정거리를 만들었다. 바다와 가까운 마을인 도순동 아이들은 조금만 커도 바닷가에 나가 고기잡이 어른들을 거들기도하고 고기 잡는 법을 배우기도 했다. 또 한라산에서 시작하여 서귀포로 빠지는 도순천에 나가 은어나 피라미 같은 고기를 잡으며 하루를 보내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법왕청신문 이존영 기자 | 초대법왕 일붕 서경보 존자님의 세계일화(태몽에서 열반까지) 글쓴이 : 담 화 발행처 : 담화문화재단 협 찬 : 법왕청평화재단 편 집 : 법왕청신문사 책 값 : 무료배포 배포처 : 법왕청평화재단 초판인쇄 : 2009년 10월 10일(1만권발행) 판권소유 : 담화문화재단 주의사항 : 무단 전제 및 복제를 금함. 참고사항 : 이 글은 초대법왕 일붕존자님의 일대기 태몽에서 열반까지를 정리한 글로서 총25회에 걸쳐 연재해 드립니다. 1. 탄생을 알리는 태몽 20세기 초, 1914년. 국제적으로는 오스트리아가 사라예보 사건을 빌미삼아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하여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고 우리나라에서는 이화학당 설립, 조선호텔 준공 경원선과 호남선 개통이 있었다. 이보다 1년 전 한반도의 가장 남쪽에 자리 잡은 제주도 남제주군 중문면 도순리 331번지(지금의 서귀포시 도순동). 이천 서씨 공도공파의 중시조격인 제주목사 10대 장손 서봉진 선생과 11대 장손 서성현 부자가 살고 있는 마을이었다. 50여 가구가 오손 도손 모여 사는 조그마한 마을로, 고기를 잡기도 하고 밭을 일구기도 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바다바람에 따사로운 봄기운이 실려 오
법왕청신문 이존영 기자 | 나는 가끔 절에 오는 불자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질 때가 있다. 그러면 대개 불자들은 가족들의 건강과 복을 구하기 위해 온다고 대답한다. 그럴 때면 적잖이 실망할 때가 있다. 물론, 집안의 평안을 위해 절에 오는 것은 만류할 수 없다. 우리 불자들은 그저 절에 가서 부처님께 내 가족 잘되게 해 달라고 향하나 사르고 절 한 번 하면 다 잘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절은 그런 곳이 아니다. 불교는 복을 구하기 위해 믿는 게 아니라 마음을 닦고 수행하는 종교다. 오늘날 불자들은 참 생명의 길을 열어 보이신 부처님의 고마움과 불법을 전하는 그 기쁨을 제대로 모른다는 느낌이다. 부처님이 우리에게 가르친 것은 그런 기복(祈福) 신앙이 아니라 복을 지어 받는 작복(作福) 신앙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불자들은 무조건 복을 구하기 위해 절을 찾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절들은 모두 기복 신앙의 원천인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심지어 기도와 독경을 열심히 하면서도 기실, 그것이 자신을 구제하고 제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엉뚱하게도, 가족의 평안을 위해서라고 대답한다. 물론, 이것도 틀린말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답은 그것이 아니다. 부처님의
법왕청신문 이존영 기자 | 고승 지눌스님은 도를 닦는 데 있어 근본이 되는 큰 문제에 대해 일상생활에 있어 놓치기 쉬운 일 하나하나를 자상하게 지적하여 수행인의 마음가짐을 정립시킨 분이다. 그 첫 번째가 “일 없이 다름 사람의 방에 들어가지 말고 병처(屛處)에 나아가 굳이 남의 일을 알려고 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곧 일없이 남의 방을 기웃거리거나 남으 비밀을 알려고 하는 것 자체가 대수롭지 않은 일 같지만, 그것이 습관화되면 도를 닦고자 하는 마음을 흩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무연사(無緣寺)! 지눌스님이 이 단락의 첫구절에서 힘을 주어 말씀하신 ‘무연사’라는 글자 속에는 수행인의 기본자세가 담겨 있습니다. 곧, 반연(攀緣) 하지 말라. 어디에 붙잡히거나 끄달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올바른 인연법(因緣法) 속에서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불교의 법은 인연법이고, 인연은 인연업과(因緣業果)의 줄인 말입니다. 인연업과를 농사에다 비유하여 봅시다. 인(因)은 종자요, 연(緣)은 땅·기후 등의 자연환경이며, 업(業)은 농업입니다. 좋은 씨(因)를 기름지고 기후가 좋은 땅에 심고(緣), 훌륭한 재배법에 의해 정성껏 키우면(業), 그
법왕청신문 이존영 기자 | 일정 스님은“생사는 본래 있는 것이 아니요, 한 생각 일어나면 그것이 나는 것이며, 한 생각이 사라지면 그것이 바로 죽는 일”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생사가 없는 확고한 금강 같은 지혜를 터득할 때 삶과 죽음의 생로병사를 초월하여 진정한 행복 추구의 즐거움이 있다는 일정 스님. 그는 본무생사(本無生死)의 실상을 깨쳐 부처님과 같이 진리에는 생사가 없다는 대해탈의 자비행을 사회 속에 각인시키고 있다. 삶과 죽음의 인식 자체는 모두 다 몽중생사(夢中生死)로 규명한 일정 스님은“결국 진리에는 태어남이 없고 또한 본래 죽음이 없으며, 나고 죽음은 본래 허망한것이므로 진리의 실상은 영원하다”는일대사 인연의 대명제를 사바제계 중생들께 화두를 던지고 있다. 일정 스님은“자유가 혜(慧)요, 자연이 정(亭)이요, 자율이 계(戒)라”면서“자율에서 자연이 나오고 자연에서 자유가 나온다”고 밝혔다. <편집자 주> 일정 스님은 게송하여 말하되 보배검을 비껴잡고 영대에 앉았으니 살활의 기이한 방편이 손끝에서 열린다. 용은 구름과 비를 얻어 옥룡사에서 신변을 부리고바람은 허공을 얻어 금용사에 마음대로 왕래한다. 橫抽寶劍按靈臺(횡추보검안영대) 殺活奇權
법왕청신문 이존영 기자 | 해봉스님 무착사 회주 - 이것이 노년의 인생이다. 늘과 땅 사람 합심 하여 천지인신 하나되어 이내일신 탄생하니 부생모육 그은혜는 하늘같이 높건마는 청춘남녀 많은데도 효자효부 드물구나 출가하는 딸아이는 시부모를 싫어하고 결혼하는 아들네는 살림나기 바쁘도다 제자식이 장난치면 싱글벙글 웃으면서 부모님의 앓는소리 듣기싫어 외면하네 시끄러운 아이소리 듣기좋아 즐기면서 부모님의 말씀하면 잔소리라 관심없네 자녀들의 대소변은 손으로도 주무르나. 부모님의 흘린침은 더럽다고 멀리하고 과자봉지 들고와서 아이손에 쥐어주나 부모위해 고기한근 사올줄은 모르도다 개병들어 쓰러지면 가축병원 데려가도 늙은부모 병이나면 노환이라 생각하네 열자식을 키운부모 하나같이 키웠건만 열자식은 한부모를 하나같이 싫어하네 자식위해 쓰는돈은 한도없이 쓰건마는 부모위해 쓰는돈은 한두푼도 아깝다네 자식들을 데리고는 바깥외식 자주하나 늙은부모 모시고는 외식한번 힘들구나 아들있고 딸있는데 양노원이 웬말인가 늙은것도 원통한데 천대받고 괄세받네 너도늙은 부모되면 애고지고 설을지라 살아생전 불효하고 죽고나면 효자날까 죽고나니 부모 팔아 예문갖춰 부고내고 조문받고 부조받네 허 허 허 허 허 허
법왕청신문 이존영 기자 | 구르몽의 낙엽송은 가을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계절병처럼 우리들 머릿 속에서 매년 재현되며 낙엽과 시몬은 되살아 난다. 우리 인간들도 시몬이 앞서서 가버린 그 뒤를 따라 낙엽처럼 곧 앞서거니 뒤서거니 쫒아갈 것이지만..... 그 되살아나는 싯귀를 올해도 읊어 주어야만 올 한해도 인생의 추수를 하고 겨울 눈을 맞이 할 것이다. “시몬, 가자. 나무 잎새 져버린 숲으로 낙엽은 이끼와 돌과 오솔길과 벤치를 덮고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밟는 소리가, 낙엽빛깔은 정답고 모양은 쓸쓸하다. 낙엽은 버림받고 땅 위에 흩어져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밟는 소리가, 해질무렵 낙엽 모양은 쓸쓸하다. 바람에 흩어지며 낙엽은 상냥히 속삭인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밟는 소리가 발로 밟으면 낙엽은 영혼처럼 운다. 낙엽은 날개소리와 여자의 옷자락 소리를 낸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밟는 소리가 가까이 오라, 우리도 언젠가는 가련한 낙엽이 되리니. 가까이오라, 밤이 오고 바람이 불고 새벽이 온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밟는 소리가“ 새벽 어둠을 뚫고 걷는 호젓한 공원 길에서 나는 낙엽에 파묻쳐 낙엽을 밟으며 걷다가 잠시 앞을 응시하면